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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Jun 09. 2023

정상과 비정상

담론권력과 타자화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의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1515)"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위의 그림에서 대체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일까. 모두가 나체로 광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저 그림은 관람자인 우리가 그림 밖에서 보면 아마 모두가 미친 장면일 것이다. 그림의 제목부터가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이다. 저 쾌락의 정원에서 대체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일까. 내가 보기에 아마 저 중에 미친 사람은 미치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미친 사람이 미치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어긋난다. 이 문장이 지식을 줄 수 없는 분석명제이다. 주어가 술어를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왜 미친 사람이 미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는 걸까. 


  여기 주어에서 말하는 미친 사람은 다수와 다른 소수 즉, 타자를 말하고, 미치지 않은 사람은 우리가 세속적으로 말하는 그 의미가 맞다. 아마 저 그림 속에서 소수는 제정신인 사람일 것이다. 모두가 옷을 벗고 있기에 옷을 입은 사람 혹은 춤추는 사람들 중에 가만히 있는 사람, 국어시간에 수학공부하는 학생 등 다수에 따르지 않고 다수와 다른 행동을 하거나 다른 상태이면 소수가 되고, 다른 시선으로 보이게 된다. 왜냐면 다수와 다르니까. 


정상과 비정상

  우리는 왜 미친 사람을 미친 사람이고 할까? 그건 아마 정상이라는 범주를 벗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상이란 대체 뭘까. 아마 정상이란 어느 목적에 적합한 상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상의 사람은 특정 목적에 적합하다는 것인데, 대체 그 목적이란 무엇인가?


  권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상사람이란 통치하게 쉬우며, 집단에 이익이 되는 사람일 것이다. 교사의 입장에선 말썽 부리지 않고 공부하는 학생일 것이고, 의사의 입장에서는 보편으로 용인되는 건강이라는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이 의학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정상이라는 범위를 벗어나면 비정상으로 취급된다. 공부를 안 하고, 맨날 말썽 부리는 학생, 비정상적으로 간 수치나 혈압이 높은 사람 등 정상의 범위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비정상으로 취급받게 된다. 


  그렇다면 왜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것일까? 아마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아닐까. 그리고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통해서 비정상으로 규정된 인물이 불이익을 본다면, 아마 정상의 범주로 취급받는 사람들은 비정상이 되지 않으려 더 노력할 것이며, 그 정상의 경계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정상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부정적인 느낌을 받게 되고, 정상만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담론권력

  그렇다면 정상과 비정상은 누가 정할까? 누가 그 경계를 그어놓고 사람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눌까? 정신병자를 예시로 들면, 그 환자를 정신병자로 규정시키는 존재는 의사일 것이다. 의사는 그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의 말에는 공신력이 생긴다. 의사면허, 의학박사 학위 등 그의 지식을 보증하는 것들이 그의 공신력을 배가시키며, 사람들의 의심을 사그라들게 한다. 여기서 의사라는 직업은 자신의 담론을 통해서 힘을 가지게 되는데, 이를 담론권력이라 한다. 그는 이 막강한 담론권력으로 인해서 정신에 문제가 없는 사람에게 조현병이 있다고 허위진단을 내려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면 의사가 진단을 내렸기 때문에.


   미셸 푸코는 지식과 권력이 맞물려있다고 말했다. 지식을 가진 자가 권력을 쥐고, 권력을 가진 자가 지식을 규정한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사회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언어게임과 같다고 말하며, 그 언어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메타서사가 있다고 말한다. 담론의 장을 언어게임에 비유하고, 그 메타서사를 누가 정하는가 하면, 그건 담론권력을 쥔 전문가들이다. 


  흔히 사람들이 대학으로 서열을 매긴다. 예를 들어서 서울대생과 지방대생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뭐라고 하던지 서울대생의 말을 더 신뢰할 것이다. 왜냐면 그는 서울대생이니까. 서울대생이라는 것은 그가 공부를 잘하며, 똑똑하다는 것을 보증한다. 하지만 지방대생은 서울대생과 지식의 수준이 같아도, 그것을 다른 것을 통해서 증명해야 한다. 여기서 학벌로 인해서 생긴 권력관계는 서울대생에게 더 큰 담론권력을 쥐어준다. 


  요즘 사회 트렌드에 맞는 비유를 하자면, 아마 유튜브를 예로 들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구독자 100만과 1만짜리 유튜버 A, B가 각각 있다. 사람들은 누구의 말을 더 믿고 신뢰할까? 같은 분야의 크리에이터라면 아마 구독자 수가 훨씬 더 많은 100만 유튜버의 말을 더 신뢰할 것이다. 왜냐면 100만 명이 구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모든 말이 소수의 구독자를 가진 유튜버의 말보다 옳다는 보장은 없다. A가 구라를 치고, B가 진실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많은 지식들을 증언의 형태로 전달받는데, 이 간접적으로 습득하는 지식은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더 공신력 있는 사람의 말을 더 믿게 된다. 


  하지만 100명이 yes라고 말하고 1명이 no라고 말한다고 해서 정답이 무조건 yes인 것은 아니다. 의외로 no가 정답일 수도 있다. 우리는 다수가 말하는 담론에 따라가기보다 스스로 판단을 해야 하지 않을까? 거짓정보와 허위정보가 넘쳐나는 21세기에 우리는 담론권력을 무조건 따르기보다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가 당연하고 생각하는 것들은 당연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게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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