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경수 Dec 19. 2023

언어와 존재

Langauge and being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an, 1872~1944) -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1930)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색상을 기하학적으로 배치한 패턴에 불과하다고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술의 맥락 안에서 저 작품의 존재와 그 위상을 이해하기보다 오로지 저 작품 하나만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몬드리안이 송신하는 코드를 관람자들은 해독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하나의 언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그림을 보더라도 누구는 눈물을 흘리며, 누군가는 저딴 게 왜 몇백억이냐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들의 해석이 다른 이유는 그들이 화가의 코드를 해석하는 언어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언어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무시를 한다고 하더라도 우린 그 무시를 언어를 통해서 하고, 그에 대한 자각과 감탄 또한 언어를 통해서 하게 된다. 인간은 언어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인간은 언어 없이 살 수 없으며, 언어를 통해서 사유한다. 사회적으로는 언어를 통해서 동일자를 확인하며, 언어를 통해서 소통하고, 그 언어를 통해서 사유하고 살아간다. 


언어와 동일자

  밈(Meme)이라는 것은 고도의 인간 사유의 총체인 문화의 구조가 생물학에서 다루는 유전자의 특성과 닮아 있다는 문화이론이다. 우리는 밈을 통해서 자신의 정신을 타자에게 전파하고, 같은 밈을 공유함으로써, 같은 세대, 같은 집단, 같은 소속이라는 소속감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밈은 언어로 된 동일자의 증표이다. 밈은 단지 장난에 불과한 놀이가 아니다. 같은 시공간에서 존재하는 이들은 밈을 통해서 그들의 사유와 언어 그리고 무의식을 '무의식'적으로 공유한다. 그냥 말장난에 불과한 밈일지라도 그것을 발화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 밈의 언어게임의 동일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밈뿐만 아니라 사투리, 모국어, 은어 등도 동일자의 상징이며, 그 보증서이다. 같은 언어를 향유한다는 것은 같은 사유방식과 문화양식, 정서와 같은 정신적인 것들을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인들은 '정'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유교적인 한반도의 정신을 공유한다.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의 언어게임이론을 창안했다. 언어게임 속에서 우리의 언어는 하나의 패와 같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혹은 같은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어느 언어게임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효과를 발휘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농담을 하는 경우와 장례식 같은 곳에서 농담을 하는 경우에, 같은 농담일지라도 그 농담이 불러오는 결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처럼 하나의 언어는 같은 발화일지라도, 상황에 따라서 다른 효과를 일으킨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속한 상황(언어게임)에 맞는 언어(게임의 패로서의 언어)를 발화하는 것은 그 언어게임의 동일자임을 은연중에 내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상황에 맞는 패, 언어, 혹은 눈치 있고 융통성 있는 행동이 자신이 그들에게 동일자임을 나타내주는 상징이자 언어가 될 수 있다. 


소통의 매개체

  제스처, 융통성 있는 판단, 말과 같은 언어를 통해서 자신이 상대방의 적인지 아군인지를 은연중에 드러낸다는 것은 그와 소통을 한다는 것이다. 흔히 언어를 떠올릴 때 말(parole)과 글(écriture) 만을 떠올릴 것이다. 아마 그게 우리가 언어를 사유하는데 한계일 것이며, 그 자체가 다일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보다 많은 언어를 통해서 소통한다. 모스부호, 몸짓, 윙크, 소리, 음악, 그림 등 많은 매개체를 통해서 소통을 한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언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언어는 파롤과 에크리튀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의 어떤 것이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면 언어가 될 수 있다. 하다못해 우리는 0과 1로만 이루어진 이진법을 통해서 카톡과 전화를 주고받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어와 영어를 통해서 소통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0과 1로 소통하는 것이며, 우리가 수신하는 한국어와 영어는 원본 데이터의 재현에 불과한 것일 거다. 


  인간이라는 존재 혹은 다른 고등생명체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려면 언어는 필수적인 요소일 것이다. 언어가 없다면 소통이 불가하며, 소통이 부재한다면 사회를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 어쩌면 인간 외의 다른 지구상의 생명체들도 그들만의 소통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사용하는 아담의 언어가 타락한 인간이 쓰는 바벨의 언어로는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생명체들이 의사소통을 못한다고 여기고, 인간만이 지적 영장류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감각질 혹은 인식틀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섣부르게 단정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내 망상일지도.


사유를 지배하는 유령

  오글거린다는 표현이 나온 이후로 사람들은 감성적인 표현을 삼가게 되었고, 선비라는 말이 나오자 절제하는 사람들은 사라져 갔으며, 나댄다는 표현이 나오자 용기 있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설명충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자기가 아는 지식을 나누려는 사람들 또한 사라졌다. 설명을 해주는 사람은 그저 자신의 지식을 나누는 친절한 사람일 뿐이었는데, 설명충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그런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선택지가 하나 더 늘은 셈이다. 또한 과거에는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이 용기 있게 말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여졌으나, 나댄다는 표현이 등장한 이후로 그의 용기 있는 말하기는 진정한 용기 있는 행위가 아니라 주제파악 못하고 설치는 행위로 판단될 가능성이 생겨서 그 발화는 스스로 지양된다. 사람들을 교육시키거나 세뇌한 것이 아니다. 그냥 단어가 생겼을 뿐인데도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바뀌었다. 


  우울증, 공황장애, 양극성장애 등 원래는 없던 질병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병명이 생겨남과 동시에 그런 질병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질병의 증상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증상을 보이면 사람들은 자신이 그 질병의 환자가 아닌가 스스로 의심하며, 의사를 찾아간다. 그리고 의사가 그 질병이라고 판정을 함으로써 그 사람은 확실하게 그 질병의 환자가 된다. 그 사람이 진짜 그 질병의 환자인지 의사도 사실은 정확히 모른다. 피상적으로만 그 질병환자처럼 보이고 사실 본질적으로는 환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환자는 의사가 전달해 준 자신이 환자라는 판정을 통해서 자신이 환자가 아니라는 가능성을 아예 배제해 버린다. 왜냐하면 의사가 환자라고 했으니.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말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언어를 벗어나서 말한다면 결국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난다는 것일까? 그건 불가능하다. 결국 그 메타언어도 언어이며, 그것을 이해시키는 과정 또한 언어를 통해서일 것이다. 언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면 알게 될 것이다. 언어라는 감옥의 밖은 언어라는 또 다른 감옥이라는 것을. 그래서 인간은 담론만 잘 조절해도 그 존재를 규정할 수 있으며, 사유 또한 한정할 수 있다.


  언어가 주는 선택지는 우리를 고민하게 만드는 순간도 있다. 학교 카페에 자주 가던 사람이 그 옆에 새로운 카페가 생기면 그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친구가 카페 가자고 말을 했을 때, 어느 카페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카페가 하나였다면 당연히 어딘지 확신이 설 텐데, 카페가 여러 곳이면 그는 어디로 갈지 결심을 해야 한다. 언어가 주는 다양성. 그건 무지개가 7가지 색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네이버 블로그

작가의 이전글 숭고미(美)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