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경수 Dec 23. 2021

파롤(Parole)과 랑그(Langue)

언어에 의한 프레이밍

   학교에서 교양강의를 통해 연이 닿은 교수님이 한 분 계신다. 그 분은 블랙베리 휴대폰을 사용하시고, 굉장히 학자느낌이 나는 분이셨다. 3년전 그 분의 강의를 들을 때 ‘교수’라는 단어가 어울리시는 분 이라고 생각했다. 그 분께 직접 찾아가 여러 질문들을 하고 답변을 듣다보니 그 분과 대화를 나눌 일이 많아졌다. 강의 중에는 스승과 여러 제자 중 한 명 으로써 일방에 가까운 소통이었다면, 개인적으로 찾아뵈었을때는 상호적인 소통을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강의에서 듣지 못한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다. 그 대화를 통해 내가 교수에 대한 프레임 혹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편견은 ‘교수’라는 파롤(Parole)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닐까?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1857~1913)


파롤(Parole)에 의한 프레임(Frame)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1857~1913)’는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이라는 개념을 말했다. 그는 개인적 발화에 의미를 부여해 주고 발화 행위를 가능케 해주는 추상적 체계를 '랑그'라고 했다. 랑그는 한 언어가 갖는 추상적인 체계이며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사회적 약속이다. 그것은 체계이기 때문에 유한하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 사용하고 있는 개인적인 발화를 '파롤'이라 말한다. 따라서 파롤은 개인적 발화 행위이며 체계의 구체적 실현이다. 파롤은 개인적 발화이기 때문에 무한하다.


  쉽게 말해서 랑그는 개념이고, 파롤은 표현이다. 앞에서 말한 교수님의 성함이 김철수라고 가정해보면, ‘김철수라는 랑그를 나는 ‘교수님이라는 파롤로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수님의 자녀분은 ‘김철수라는 랑그를 ‘아빠라는 파롤로 표현  것이다.


  내가 가진 교수라는 직업에 대한 이미지는 대단히 똑똑한 사람이고, 나같은 일반인과는 다르며, 클래식 음악을 들을 것 같은 사람이다. 또한 옷은 항상 깔끔하게 입고, 양적 쾌락보단 질적 쾌락을 추구할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나에게 아빠의 이미지는 밖에서 일하고 집에 들어와 티비를 보거나 엄마에게 잔소리 듣고, 가끔 나에게 용돈을 주는 사람이다. (특정 직업이나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누구나 다를 수 있다. 나의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럼 다시 김철수 교수님 얘기로 넘어가면 나는 김철수 교수님이 락, 메탈, 트로트, 힙합같은 대중적인 음악보단 클래식이나 오페라 같은 고전적이고 차분한 음악을 좋아하실 거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분을 ‘교수’라는 파롤로 표현하기 때문에 나만의 프레임으로 김철수 교수님을 바라 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분은 메탈리카를 좋아하신다고 한다.


  김철수 교수님께 아들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 아들도 나와 같은 프레임으로 아빠를 봤을까? 만약 김철수 교수님이 집에서 맨날 민소매에 속옷차림으로 티비만 보시는 분이라 가정한다면,  교수님의 아들은 아빠가 교수로써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보단 집에서의 모습을 기준으로 프레임을 가질 것이다. 나와 교수님의 아들(이하 지수)이 ‘김철수’라는 사람을 다르게 보는 이유 중에 하나는 지수가 나는 다른 파롤로 같은 랑그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같은 뜻 , 그러나 다른 표현

  1,2,3,4,5,6,7,8,9는 모두가 아는 아라비아 숫자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되는 숫자가 아니라, 세계 어딜가도 통하는 기호이다. 그래서 우리는 외국에 여행을 가면 글자는 몰라도 숫자는 안다. 이러한 아라비아 숫자는 수학시간에 제일 많이 볼 수 있다. 만약, 한국에서만 자라서 영어를 아예 못하는 학생이 미국에서 "1+1=?"이라는 문제를 풀어야한다면 언어와 상관 없이 "2"라는 답을 쓸 수 있다. "1+1=2"라는 문제를 학생이 맞춘 이유는 아라비아 숫자와 사칙연산기호가 앞에서 말한 '랑그'와 같이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세계 누구라도 이 사회적 약속을 안다면 "2"라는 답(랑그)를 말할 것이다.


  그럼 반대로 상대에게 "2"를 "2=?"로 표현하도록 시켜야하는 경우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상대는 수식을 세워서 2라는 답이 나오도록 식을 만들어야 한다. 상대는  "2=1+1"로 표현 할 수도 있지만 "2=3-1"로도 표현 할 수 있다. 사칙 연산만을 이용해도 우리는 "2"라는 '랑그'를 무한하게 표현 할 수 있다. 여기서, "2"라는 답은 랑그이고, "2"라는 랑그를 표현하는 "1+1"이나 "3-1"은 파롤이다. 이로써 앞에서 말한 랑그의 유한성과 파롤의 무한성을 증명 할 수 있다.


  우리의 언어도 수학처럼 무한한 파롤로 유한한 랑그를 표현한다. '김철수'라는 한 사람을 난 김철수 '교수님'이라는 파롤로 , 지수는 '아빠'라는 파롤로, 지수의 어머니이자 김철수의 아내는 '여보'라고 , 김철수의 부모는 '아들'로 표현 하는 것처럼 '김철수'라는 하나의 랑그를 모두가 다른 파롤로 표현한다.


근본적 귀속오류

  '사이코'라는 말은 한국에서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칭하거나 비하할때 쓰는 '파롤'이다. 하지만 일본어 "さいこう("사이코"라 발음)" 는 '최고'라는 랑그의 파롤이다. 한국인이 친구에게 "사이코"라고 한다면 비하이지만 일본인이 친구에게 같은 말을 한다면 그것은 칭찬이다.  그렇다면 한국인 두명과 일본인 한 명이 만났는데, 일본이 칭찬의 뜻으로 "사이코!"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일본어를 모르는 한국인들이라면 시비를 거는 것으로 오해를 할 것이다. 반대로 일본인 두 명과 한국인 한 명이 만났는데, 한국인이 그 둘에게 "사이코"라고 욕설을 하면 한국어를 모르는 일본인들은 칭찬을 들은 것으로 오해 할 것이다. 이처럼 파롤은 같지만 다른 랑그를 의미해서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를 근본적 귀속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고 한다.


  세계화된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근본적 귀속오류는 흔한 현상이다. 다양한 인종과 여러 문화권의 사람들을 접하다 보면 문화적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보편적이 않고 상대적인 세상에서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더욱 세계인들과 연결되고 가까워진다. 내가 김철수 교수님을 '교수'라는 파롤로 표현함으로써 '김철수'라는 랑그에 프레이밍을 한 것 처럼, 우리는 어떤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파롤을 통해 왜곡(혹은 프레이밍) 시키는 것은 아닐까? 파롤로 인해 본질적인 랑그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네이버 블로그로 보기

작가의 이전글 하지만 누군가는 불편한 진실을 말해야하는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