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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론

이름이 곧 존재이자 문제

by 오경수
몬드리안_검은선의 구성2(1930).jpg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an, 1872~1944) - <검은선의 구성 II>(1930)

위의 사진이 그림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 예술가라는 존재가 검은선이 수직과 수평으로 있는 캔버스를 작품이라 명하고, 그것에 이름을 부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예술가라는 존재는 예술가라는 존재방식 혹은 직업이 있기에 그는 예술가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예술가일까? 단지 예술을 해서 예술가일까? 예술을 통해서 먹고살기 때문에? 아니면 그의 최종학력이나 학위 때문에? 아니면 그가 예술계에서 가지는 명성 때문에? 이런 식으로 그 존재의 근원을 파고들어 가다 보면 우린 그 숲에서 헤매게 된다. 왜냐면 그 존재를 보증하는 어음은 너무나도 정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선거 한 번으로 지역의 색깔이 바뀌듯이, 존재의 본질과 그 지위는 세계의 시련 속에서 너무나도 위태로운 갈대와도 같다.

결국 그가 예술가인 이유와 그 그림이 작품인 이유는 그 존재들에게 붙여진 단어 때문이다. 예술가라는 단어가 선행함으로써 우리는 예술가라는 개념을 알고, 어떤 사람이 예술가인지 판별할 수 있다. 이러한 언어의 한계 속에서 우린 인식하고, 사유한다. 내가 아는 단어 속에서만 사유하고, 세상을 바라본다.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1966)에서 근대의 종말을 논하고, 근대의 에피스테메(épistémè)였던 인간(homme)은 모래사장에 그려진 얼굴처럼 사라지고, 그다음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언어'일 것이라 말했다. 내가 앞서 언급했듯이, 우린 언어라는 감옥 안에서 사유하고, 인식한다. 이 언어라는 것은 칸트식으로 말해서 인식틀이다.

우리는 도둑 잡기나 원카드 혹은 고스톱이나 섰다를 할 때, 카드라는 도구가 무조건 필요하다. 카드라는 종이는 그저 그림이 그려져 있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지만, 도박이라는 게임 속에서 그 카드의 무늬는 다른 카드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부여받고, 나름의 권력을 가지게 된다. 아무것도 아니던 카드가 어떤 상황에서는 나의 승패를 정해줄 열쇠가 되며, 한 끗 차이로 나의 패는 상대의 패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다. 위대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게임을 자신의 언어철학에 접목시켜 언어게임이라는 이론을 창안했다. 같은 카드라도 어떤 게임이 진행 중이냐에 따라서 그 카드의 역할과 쓰임이 다르듯이, 우리의 언어도 그렇다는 것이다. 똑같은 말이라도 상이한 두 상황 속에서 각자 다른 의미를 가지며,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도 나의 카드 패는 어떤 승부수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우린 언어라는 카드를 통해서 세계에 기투(entwurf)하며, 그 카드를 통해서만 세계와 타자에 도달한다.

결국 비트겐슈타인도 구조주의자인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부여받는 본질과 언어라는 감옥구조 속에서 인간을 바라본 그의 철학은 언어와 상황이라는 한계 요소를 통해서 인간을 재정의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유하고, 언어를 통해서 세계를 지각하며, 타자와 접촉한다. 그렇다면 우린 언어라는 거대한 구조 속의 객체에 불과한 존재일까?

이름이 없던 무언가에 이름이 생긴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과도 같다. 국가, 철학, 사회, 사랑 그리고 신.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추상적인 개념이자 어쩌면 인간이 그것을 인식하기에는 인식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단어를 익힘으로써 그 개념을 파악하고, 그것을 믿고, 인식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시로 정신질환을 들 수 있다. 과거에는 공황장애, 우울증, ADHD, PTSD와 같은 단어가 대중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정신적으로 어떤 힘든 상황이 와도, 그저 지나가는 기우에 불과한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매체의 보급과 정신의학에 대한 관심의 증대로 이러한 질병의 이름과 증상이 대중적으로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잠시 지나가는 일시적 불안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질병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너무나도 비슷한 증상과 내 얘기를 하는 듯한 그 소름 돋는 용함은 자신이 그 질병의 환자가 아니더라도 그 공감을 느낀 이상 그 질병의 환자이게 만든다.

결국은 일반적으로 느끼던 것이라도, 그것을 문제 삼고, 그것에 이름을 부여하면 그건 더 이상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고 있던 카드 게임에서 갑자기 하나의 새로운 카드가 생기는 것뿐인데, 언어라는 카드를 통해서 존재하는 인간에게 새로운 카드는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게 된다. 이름이란 그저 덧없는 꼬리표가 아니다. 그 이름이란 그 존재가 더 이상 무시되지 않는 존재임을 증명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언어인 그 이름은 시선의 통과가 가능한 투명한 존재가 아니라 시선의 도착점이 되는 불투명한 존재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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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저서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 - 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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