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통한 알레테이아
사람을 볼 때 일반적으로 얼굴을 가장 먼저 바라본다. 그의 얼굴을 응시함이 어쩌면 만남 혹은 비극의 시작일 것이다. 그의 관상으로 그의 성격에 대한 편견을 가질 수도 있으며, 혹은 반대로 호감을 느낄 수도 있다. 흔히들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고 하는데, 이 또한 얼굴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녀를 바라볼 때의 눈동자와 재채기를 하기 전의 표정 등은 의도적으로 숨기기 어렵다.
얼굴은 많은 것을 드러낸다. 이성적으로 확실학 말할 순 없지만 우린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서 그의 감정을 유추할 수 있고, 하이데거가 고흐의 구두에서 농촌 아낙네의 존재 자체의 드러남을 발견하듯이, 그의 인생 자체의 드러남(aletheia)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러한 자료들을 귀납하여 관상학이라 하는 학문도 탄생했을 정도로 사람들은 얼굴을 매우 신경 쓴다. 의학의 발전은 그러한 타고난 관상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현존재에게 주었으며, 얼굴 자체가 명함이 되는 시대를 우린 살고 있다.
때론 궁금하다. 아예 모르는 사람을 대중교통이나 길가에서 볼 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혹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지. 저 어두운 표정 너머로 어떤 고통이 도사리고 있을지. 혹은 저 웃음은 무엇을 가리기 위한 가면일지. 그리고 나의 얼굴은 그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세상에서 내가 제일 슬픈 거 같고, 힘든 거 같을 때 다른 사람의 표정을 보면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종종 든다. 저 퀭한 눈은 어떤 눈물을 참고 있을지 모르고, 저 풀린 눈은 어떤 힘든 하루를 보냈을지 내가 감히 예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다. 세상엔 너보다 힘들고 불행한 사람이 많다. 나는 그 말이 납득이 안 갔었다. 나의 인식틀로 어떻게 남의 불행을 나의 불행과 비교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에 나는 그 말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이 이해가 조금씩 되는 것 같다. 자세한 인생사는 몰라도 그의 표정과 눈동자만 보아도 이제는 그 존재가 느끼는 부담감의 무게와 삶의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다. 내가 사회인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들이 힘든 것을 공감한다고 내가 덜 힘들어지는 것은 아니더라. 그들의 고통을 공감해도 나에겐 위로가 되지 않고, 나는 여전히 그 무게를 감당하기에 벅차다. 하지만 남들도 다 느끼는 고통이기에 이 고통이 나에게만 내린 저주가 아니라 사회인이라는 선험적 주체가 보편적으로 느끼는 공통감이라는 것은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체감하게 만든다. 이 공통감은 내 동년배도 느끼고, 나의 선배들도 느꼈고, 나의 부모님도 느꼈을 것이다. 이 고통이라는 형벌을 먼저 선고받은 주변인들이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과 다르게 존재하고 싶기도 하다.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이 고통이라는 것 자체를 삶에서 덜어내고 싶기도 하고, 이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고 싶기도 하다. 이 고통을 내가 꼭 아픔을 느끼면서까지 견뎌야 할까? 아니면 이 아픔이 무뎌지기까지를 기다려야만 할까? 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면 다음 고통도 견디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과 이 고통에서 도망치면 더 나아질 거 같다는 생각 사이에서 오는 딜레마가 오늘도 나를 잠 못 이루게 한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이 고통과 어떻게 공존해야 할까? 내 눈동자 너머로 보이는 고통은 다른 존재자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그 고통 속에서 나는 성장하는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기도 하다. 성장통이 아니라 그냥 고문이 아닐까 싶은 순간이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내가 떠날 수 있는 대안도 없고,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고통스럽다. 내 눈동자 뒤에 숨어있는 고통은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일까. 과거의 고통은 나에게 역사라는 것을 남기는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라는 고통은 나에게 과연 줄 수 있는 게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