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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Was darf ich hoffen?

by 오경수
알렉스 카츠_로라15.jpg 알렉스 카츠(Alex Katz, 1927~) - <로라 15>(2017)

쇼펜하우어가 말하길 인간은 권태와 결여 사이를 번갈아가면서 느끼는 존재하고 한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결여로 인해서 절망을 느끼고,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권태를 느낀다. 그래서 인간은 권태와 결여를 반복해서 느끼는데, 이는 마치 진자운동하는 시계추와 같다. 이 진자운동이 우리의 불행의 원인일까. 그렇다면 이 진자운동을 끝낸다면 어떨까? 이 진자운동의 끝은 존재의 죽음이거나 부처와 같이 해탈을 해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에 과연 누가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결국 이 진자운동은 존재가 살아있는 한 계속 겪어야 할 숙명이며, 그 숙명은 존재를 더욱 슬프고,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누구나 원하는 것이 있으며, 추구하는 바가 있다는 것은 목표가 있는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때론 그 목표가 나를 병들게 한다.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일 때, 아니면 그 목표를 잃었을 때, 우린 존재의 나침판을 잃어버린다.

원하는 것을 원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희망이자 삶의 원동력인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어쩌면 희망과 원동력이 없는 삶을 의미할 것이다. 적당한 목표와 성취는 나에게 기쁨을 준다. 그 목표의 크기가 클수록 더 큰 역치의 기쁨을 주는 걸 알기에 우린 더 큰 꿈을 가지고 이루려 한다. 이루기 힘든 것을 이룰수록 더 큰 성취와 기쁨을 누리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루지 못하는 것을 추구할 때다. 추구해야 할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경계가 정확히 나누어져 있지 않기에 우린 때론 이룰 수 없는 꿈과 사랑을 추구한다. 현실과의 타협, 타자의 배려 등 변수는 너무나도 많은 만큼, 목표대한 다양한 걸림돌과 디딤돌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까. 체게바라의 말처럼 이룰 수 없는 꿈을 품고 살아가야만 할까? 틀에 박힌 감옥과도 같은 일상에서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꿈이자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원동력이 되는 무언가를 가져야만 긍정적으로 살아갈 텐데, 그게 어렵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걸림돌과 변수들 그리고 가능성이 있다. 이런 복잡한 세상에서 과연 나는 무엇을 바라며 살고,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이 광활한 우주에서 ‘나’라는 점은 무에 가까운 존재임에도, 나는 나의 우주의 중심이기에 모든 선택에 신중해진다. 대체 뭐가 맞는 걸까? 이 넓은 세상에서 하나의 점보다도 작은 존재이기에 나를 펼치는 게 맞을까 아니면 더 현실적으로 살아서 안정을 추구하는 게 맞을까? 이 안정 속에서 느끼는 권태감이 나를 모험하게 만들면서도, 결여의 고통을 알기에 나는 그 모험을 선뜻 떠나지 못한다. 대체 이 망망대해에서 나는 어떻게 존재해야 할까. 연어처럼 거슬러야 할까. 아니면 돛단배처럼 그저 세상의 바람에 나를 맡겨야 할까. 현실과 이상이라는 두 요소는 왜 나에게 선택이라는 것을 줘서 나를 힘들게 만들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살아남게 되더라. 결국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돈인데, 돈은 어떻게든 벌 수 있더라. 편의점에서 바코드를 찍던, 식당에서 음식을 서빙하던가 설거지를 하던지 어떻게든 뭐든지 하면 살아남더라.

결국 중요한 것은 돈에 대한 마인드를 어떻게 컨트롤하느냐인 것 같다. 자본과 소비담론에 휩쓸리지 않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고, 차이가 아닌 필요와 본질에 의한 소비를 한다면 돈에 대한 욕망은 적어질 것이고, 자연스레 그 욕망의 감소가 불안의 감소가 될 것이다. 진자운동의 폭을 줄이는 것. 어쩌면 이게 내가 진정으로 바래야 할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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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저서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 - 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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