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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여에 대한 결여

A lack of deficiency

by 오경수
말레비치_검은 원.jpg 카지미르 말레비치(Казимир Северинович Малевич, 1879~1935) - <검은 원>(1924)

부족함이 없다는 건 좋은 것으로 인식된다. 우린 항상 부족한 무언가를 채우려고 돈을 벌고, 사랑을 갈구한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밑 빠진 독과도 같아서 항상 충만함으로 가득할 순 없다. 따라서 결여의 부재는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 그게 가능한 사람을 굳이 찾자면 깨달음을 얻거나 득도한 사람정도? 근데 시뮬라크르 사회에서 어떻게 비교와 필요에 의한 욕구가 없겠는가. 그런 면에서 애초에 이 시대에 해탈은 불가능하다.

욕구는 인간을 움직이게 만든다. 탄탄한 몸매를 원하는 자는 운동을 하고, 자가로 집을 마련하고자 하는 자는 경제활동을 하고,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욕구는 그를 공부하게 만든다.

결여가 없다는 건 욕구가 없다는 말과 같을까? 그렇다면 결여가 없다는 건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인의 부재를 의미할 것이다. 원하는 것이 없는데 왜 움직이고, 탐구하는겠는가. 그 자체로 충분한 즉자적인 사물과 같이 결여가 없는 인간은 그 자체로 평생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결여가 없다는 게 과연 좋은 것일까? 결여가 없다면 그 결핍을 채울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에게 변화란 없을 것이다. 다른 말로는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왜 우린 거울을 보는가? 왜 시계를 보고 몇 시인지 인지하는가? 우린 항상 변화를 추구하고, 대비한다. 그리고 그 변화란 그 자체로 온전하지 않고, 불완전함 존재에게 필연적이며, 어쩌면 선험적으로 타고난 진리와도 같을 것이다.

결여에 대한 결여. 이것은 어쩌면 충분 그 자체로 해석될 수도 있다. 부족한 것이 없음으로 이해되는 이 말장난은 사실 그렇게 이상적이며 행복한 사건이 아니다. 결여의 결여. 그것은 원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원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없으며, 더 이상 그가 무언가에 의해서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뜨거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꿈을 이뤘다는 것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성취가 더 큰 역치의 성취감을 요구한다. 따라서 인간은 결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다. 즉자존재가 아닌 대자존재인 인간에 결여란 실존과도 같이 존재를 선행하는 본질과도 같다. 음식을 한번 먹는다고 그 영양분이 평생 우리의 몸에 갇혀있지 않으며, 사람들은 나에게 오고 떠난다. 여름의 온기는 가을이 오면 나를 떠나고, 겨울의 냉기도 봄이 오면 나에게 결여의 대상이 된다. 계속 채우고 비우고를 반복하는 인간이 결여를 결여하는 방법은 어쩌면 시간이 멈추는 것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존재의 선험적 지평인 시간은 우리가 무엇을 하던 상관없이 흐르고 있으며, 멈출 수 없다는 걸.

인간에게 결여란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를 움직이게 하고,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하지만 우린 그 허공을 무언가로 메꾸려 한다. 돈과 같은 물질적인 것과 타자의 인정과 같은 감정적인 것으로. 그러나 우린 안다. 그 빈 곳을 채우면 다른 빈 곳이 드러난다는 것을. 욕망과 권태를 시계추처럼 오고 간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인간에게 영원한 행복과 긍정은 불가능한가. 그렇다면 그 결여를 긍정적으로 맞이하고, 그 적과 부딪히지 않고 잘 타협하는 게 잘 사는 방법일까? 그게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와 아모르파티(Amor fati)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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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저서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 - 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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