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베이컨─비명 지르는 피사체

sujet hurlant

by 오경수
Francis Bacon(1909-1992) - 「Study for a Portrait 」(1952)

베이컨의 회화에서 우린 인간 존재의 불안, 고통,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너무나도 강렬하게 표현된 그러한 정념이 관람자로 하여금 보기 불편하게 만든다. 삶이라는 게 고통 그 자체인데, 그걸 망각하고 있다가 복기했기 때문일까? 유난히 고통과 비명이라는 제재가 더욱 불편하게 느껴진다.

아마 그 이유 중에 하나는 형상(Figure)의 왜곡일 것이다. 베이컨의 인물은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뒤틀리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표현된다. 고전주의적 회화와는 다른 노선으로 인물을 묘사하는데, 그것은 큐비즘이나 포비즘처럼 형태만 기존의 회화와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 속 형상의 감정마저 왜곡한다. 아니, 어쩌면 피사체의 무의식에 숨어있는 고통과 불안을 끌어내어 그가 비명을 지르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왜곡은 단순한 기괴함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불안, 고통, 폭력성을 드러내는 미학적 내러티브다. 특히나 육체성과 물질성을 통해서 베이컨은 인간의 신체를 '고깃덩어리(flesh)'처럼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죽음과 삶의 경계, 인간이 결국 물질적 존재임을 환기시키는 효과를 준다. 베이컨은 인간이 스스로를 대자존재라 칭하며, 짐승이나 즉자적 존재와의 경계선을 긋고, 그 대상과의 수직적 이항대립 관계를 수립하는데, 베이컨은 이를 비웃으며, 결국 인간도 죽음 앞에선 한낮 고깃덩어리에 불가능한 물질적 존재임을 폭로한다.

Francis Bacon(1909-1992) - 「Crouching Nude 」(1951)

베이컨의 그림은 감정을 설명하거나 상징하지 않고, 관람자에게 직접적인 감각적 충격(sensation)을 준다. 보통의 그림은 감정을 표상으로써 드러낸다. 시각이라는 감각으로 관감각적 관조가 아닌 신체적 반응을 이끌어낸다. 베이컨의 회화는 감정을 묘사하지 않고, 감각(sensation) 자체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신체적 충격, 진동, 강렬함을 느끼게 하는 회화적 힘을 중시한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을 "무언가를 '재현'하는 회화가 아니라, 감각 그 자체를 화면 위에 현존하게 하는 회화"로 보았고, 이를 통해 신체·감각·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펼쳤다.


베이컨의 회화에는 프레임이 있다. 이 프레임이란 액자와 같은 작품 자체의 테두리 같은 파르마콘*이 아니라 제재(subject)로서의 테두리다. 베이컨은 테두리 자체를 작품 안에 담는다. 그것은 육면체와 같은 입체도형인데, 면은 없으며 오로지 모서리만 존재한다. 그것은 유리로 된 입방체인 것일까? 아니면 그저 선만 존재하는 뼈대에 불과한 것인가? 이러한 테두리는 비명을 지르는 피사체를 담고 있다. 다르게 말해서 비명 지르는 존재는 그 테두리 안에 갇혀있다. 갇혀있어서 비명을 지르는 것인지, 아니면 비명을 지르는데 그 안에 있는지 정확한 해석은 불가능해 보인다. 비명을 지르는 형벌로 테두리에 갇힌 것인가? 아니면 테두리에 갇혀서 비명을 지는 것인가? 이러한 테두리는 고립감과 긴장감을 강화하고, 인물과 배경을 분리시켜 존재의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실존주의적 요소로서 그림의 내러티브를 더 어둡고 풍부하게 만든다.


위의 그림에서 흥미로운 점은 피사체의 입을 관람자는 발견할 수 없음에도 마치 그것이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은 '시각적 환청'을 듣는다는 것이다. 베이컨의 작품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이목구비의 다른 부분은 그리지 않아도 입은 반드시 그려서 비명을 지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인데, 위의 「Crouching Nude 」(1951)에서 우리는 피사체의 입은 커녕 얼굴도 발견하지 못하는데 비명을 듣는 것 같은 환상을 느낀다. 그것은 아마 피사체를 둘러싼 검은 붓칠이 너무나도 역동적이라 우리가 그것의 아우라에 빨려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명암표현을 보는 것과 같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Francis Bacon(1909-1992) - 「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1962)
Francis Bacon(1909-1992) - 「Three Studies of Lucian Freud」(1969)
Francis Bacon(1909-1992) -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1944))

베이컨은 자주 3폭화(Triptych)를 그렸다. 이는 내러티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감각이 서로 울림을 주고받는 리듬적·음악적 효과를 내기 위함이라 한다. 베이컨의 3폭화 앞에 선 관람자는 세 개의 피사체와 마주하게 되는데, 마치 세 명의 재판관에게 심판을 받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공포스러운 육체와 흉측한 안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존재의 입과 내 안의 불안과 공포인데, 이는 나에게 그간에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묻는 것 같다.

과연 저 심판관들 사이에서 떳떳하고 자유로울 아담의 언어를 구사하는 존재란 존재할 수 있을까? 소돔과 고모라처럼 더럽고 문란한 현대에 살고 있는 현존재라면 누구나 저 재판관들과 눈을 마주칠 수 없을 것이다.

왼쪽은 벨라스케스의 원본, 오른쪽은 베이컨의 「Study after Velá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1953)

교황도 결국 세상에 던져진 피투체에 불과하며, 죽음이라는 사건 후에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범인이라는 것을 폭로하기 위함일까? 베이컨은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을 패러디함으로써 교황도 그저 우리와 같은 존재임을 폭로하고, 그도 테두리에 가둠으로써 유한한 존재에 불과한 그저 범인으로써의 현존재임을 드러낸다.

Francis Bacon(1909-1992) - 「Figure with meat」(1954)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는 인간을 고귀하고 이성적인 존재로 그리기보다, 육체적이고 본능적이며 상처 입은 존재로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종종 불안하고 폭력적이며 충격적이지만, 동시에 인간 실존의 진실한 측면을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 원래 의도는 파르마콘(Pharmakon)이 아니라 파르레곤(Parergon)이었으나, 오타로 인해 전자를 선택했다. 하지만 파르레곤이라는 말이 작품인 듯 아닌 듯 하지만 작품에 영향을 주는 요소로서 작품의 주변부에 존재하기에, 파르마콘이라는 표현이 문맥상 어색하지 않기에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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