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 속 무(néant)

Le néant dans l’art

by 오경수
빌렘 드 쿠닝_Police-Gazette - 1955.jpg Willem de Kooning(1904-1997) - 「Police Gazette」(1955)

회화의 프레임 속은 가득 찬 공간이다. 그러므로 우린 프레임이 회화의 경계이며 동시에 그 한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한계 속에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무한한 창의력을 발휘하여 예술을 실현하고, 작품을 탄생시킨다. 유한한 질료로 무한한 형상 혹은 정신적인 산물을 낳는 예술은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존재에게 아직 그것이 온전히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다. 우리는 분명히 예술을 즐긴다. 우리 일상 속에서 예술이 아닌 것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예술과 삶의 경계가 허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예술이 정확이 이것이다!라고 정의 내리지 못한다.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에 따르면 예술은 자신의 현존을 통해 사회를 비판한다. 즉, 예술의 존재 그 자체가 ‘반사회성’을 띈다는 말이다. 따라서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예술은 사회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사회와 거리를 두고 그것과 급진적으로 다른 타자로 머무는 것. 그것의 비동일자로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예술이 사회를 비판하는 방식이다(진중권, 2003, 95)." 그러므로 사회가 행하는 동일화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예술은 끊임없이 자신을 혁신해야 한다.


또한 아도르노는 예술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존재론 외에도 예술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도 논했는데, 작품의 진리에 관한 최종적 해석을 거부하고 무한한 해석의 놀이를 풀어놓는 현대예술의 구조를 그는 "수수께끼"의 은유로 표현한다(진중권, 2003, 108).

빌렘 드 쿠닝_Woman VI 1953.jpg Willem de Kooning(1904-1997) - 「Woman VI」(1953)

사물의 존재란 그를 향한 필요에 의해 두드러지게 된다. 목수가 아닌 이상 우린 평소에 망치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저 갑자기 못을 박을 상황이 생길 때 우린 망치나 해머를 필요로 하며, 그를 찾음으로써 그의 존재의 필요성이 드러난다. 이때 그 연장은 손 안의 존재(Zuhandensein)라는 도구가 되어 우리의 행위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우린 예술작품을 대할 때 다른 태도로 이 사물 존재에 임하게 된다. 우린 갑자기 그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린 갑자기 그림이 필요하며, 그것 만으로 무언가를 해결할 상황을 맞이하지 않는다. 그러한 상황이 없음에서 알 수 있듯이, 온전히 관조의 대상으로서의 예술작품은 생필품이 아니다. 그저 부차적인 것이다. 예술이란 기성담론이 논하듯이 어쩌면 부르주아들의 고급 취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완전한 대자존재인 현존재는 끊임없이 예술을 추구한다. 그가 가난하든, 풍족하든, 외롭든 항상 그것을 갈구하며, 그것으로 안정을 얻는다. 하지만 현존재에게만 그것은 그러한 대상이다. 강아지나 고양이에게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 그저 공기의 진동인 소리에 불과하고, 회화는 그저 벽에 걸려있는 평평한 사물에 불과하며, 무용이란 그저 자신의 주인이나 인간이라는 종족이 몸을 움직이는 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즉, 인간의 관조와 그를 행하는 정신적인 요소가 그 사물이나 행위를 예술로 정의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빌렘 드 쿠닝_ A tree in naples 1960.jpg Willem de Kooning(1904-1997) - 「A Tree in Naples」(1960)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속이 빈, 혹은 무(néant)로 가득 찬 껍데기에 불과하다. 예술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작품이라는 사물존재는 그저 허상이며, 그저 현존재가 자신의 인식틀과 미학 혹은 정념이라는 감정을 통해서 아무것도 아닌 행위나 사물에 예술이라는 실루엣을 씌우고, 작품으로 명명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이라는 것은 사회적 통념이며, 동시에 모든 인류가 믿는 거짓말이며, 종교다. 예술 작품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예술가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다. 자신의 작품이하나도 없는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작품은 예술가의 기원이다. 여기에 해석학적 순환이 있다. 작품은 예술가에게서 나오는데 예술가는 작품에서 나온다. 그 둘 중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원론적으로 예술의 본질은 실제적인 예술작품에서 수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을 결정해 주는 상위 개념도 없다. 주어진 대상들 사이에서 성질들을 선택하거나 원칙들로부터 개념을 추출하는 일이 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해석학적 궁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우리는 예술작품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에서 예술의 본질을 끌어낼 수밖에 없다(박정자, 2005, 116-7).


국가라는 것의 실체는 없다. 하지만 우린 대통령이 실존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국회의사당을 통해서 사법부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예술은 없으나, 예술가는 존재하며, 예술작품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동어반복일 수 있는데,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으나, 아름다운 존재는 존재한다. 회화의 아름다움. 그것은 작품의 무(néant)를 가리는 베일과도 같은 종교적 형용사다.


Reference

박정자, 『빈센트의 구두』, 에크리, 2005.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아트북스, 2003.


네이버 블로그


글쓴이 저서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형이상학적 시선─보이지 않는 침묵과 형상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랑의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