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presentation of unconsciousness
벡신스키의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린 편안함보다 불편함 혹은 공포를 느낀다. 디스토피아적인 서사가 담긴 듯한 그의 화폭에 우리에게 안정을 줄 수 있는 미학적 알레고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황폐함. 비관적인 미래와 부재하는 낙관뿐만 아니라, 피사체 자체가 그로테스크하기에 우린 이곳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이 작품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절망과 공포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뿐이다.
따라서 추하거나 무서운 것들은 혐오감과 공포를 자아낼 뿐 미적 쾌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하다. 그런데 아름답기는커녕 오히려 추하고 혐오스러운 대상 앞에서 전율하며 강렬한 미적 감동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 작품들을 만드는 예술가 집단도 이미 대규모로 형성되어 있다. 그 작품들을 미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숭고다. 현대의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예술 경향은 미가 아니라 숭고 미학으로만 해석될 수 있다. 도덕적으로 고상하고 우월한 대상을 ‘숭고’하다고 생각하는 상식적인 관념과는 다소 동떨어진 개념이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숭고함은 위대, 장엄 등 윤리적 맥락이고, 미학에서의 숭고 개념은 물론 위대, 장엄도 포함하지만 혐오스러운 것, 무서운 것, 섬찟한 것들에까지 확대된다(박정자, 2023, 19).
수용적 측면에서 우린 벡신스키의 그림 앞에서 미적 공포(the Sublime of Horror)를 경험할 수 있다. 칸트가 말한 숭고 개념과 연결할 수 있는데, 그의 그림은 너무 낯설고 거대해 감상자가 불안과 매혹을 동시에 경험하게 한다. 즉, 혐오와 매혹이 공존하는 미학이 그의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 인간의 탈형상화. 이를 통해 벡신스키의 그림은 인체가 뒤틀리거나 해체되는 장면은 개인의 정체성 붕괴, 혹은 육체적 존재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다. 이는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몸 없는 기관"(corps sans organes)을 떠올리게 한다.
벡신스키는 초현실주의, 환상적 사실주의에 가까운 표현 방법으로 기괴하면서도 정교한 디테일로 인간의 공포, 죽음, 파괴를 표현했다. 이러한 그의 스타일에 맞게 그가 주로 그린 주제는 황폐한 풍경, 기괴한 신체 변형, 종말론적 분위기를 띤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단순히 감상자의 마음에 순간의 공포를 선사하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감상자가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오성의 합치로서의 감상이 아니라 이성의 사용으로 인해 자신의 이성의 존재와 그 가능성을 열게 만들게 하므로, 그의 작품은 칸트 미학에서 말하듯이 아름다움보다 숭고의 성질을 가진다.
벡신스키는 주로 유화(Oil painting) 기법을 사용했으며, 색감은 어둡고 차갑지만 세밀함은 극도로 정교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작품이 아니라 악몽의 표상을 접하는 것 같은 경험을 선사한다.
양차 전쟁이라는 시대적 비극 그리고 가족의 비극(아내와 아들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비극을 겪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 세계는 이러한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인가?
그는 자신의 작품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작품의 이름도 짓지 않는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제목이 Untitled이다. 예술 평단에서는 벡신스키를 흔히 "어둠의 화가" 또는 "악몽의 기록자"라고 부르는데 반하여 본인은 "내 작품에 어떤 메시지도 담지 않았다. 단지 보기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을 뿐이었다"라고 응수한다.
벡신스키(Zdzisław Beksiński)의 작품은 단순히 “공포스럽다”거나 “악몽 같다”는 묘사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현존재에게 이 기분 나쁜 그림은 그저 흉한 사물이 아니다. 이것은 엄연히 예술 작품이다. 이것은 그 존재 자체로 자기 충족적이며, 동시에 대자적인 존재인 현존재는 이것에 이끌리고, 이것에서 무엇을 찾아내고, 보려고 한다. 그래서 우린 이 기분 나쁜 그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악몽의 데자뷰처럼 어디선가 본 거 같은 익숙함 그리고 추함과 노스텔지아가 공존하는 이상한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현존재가 망각하고, 응축되지 않은 그의 무의식 그 자체이기 때문일까?
벡신스키의 그림은 사진처럼 정밀하지만, 대상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왜곡된 신체나 황폐한 건축물이다. 이는 사실주의적 기법과 초현실적 주제를 결합한 독특한 긴장을 만든다. 세밀성과 비현실성의 공존이 그의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뿐만 아니라 벡신스키는 주로 흙빛, 회색, 붉은 톤을 사용하여 부패, 소멸, 죽음을 연상시킨다. 마치 캔버스가 "썩어 들어가는 듯한 질감"을 전달함과 동시에 폐허의 먼지를 맡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다.
그의 회화에서 화면 구성은 종종 대칭적이거나 건축적 질서를 띠지만, 그 안에 자리한 인물이나 사물은 파괴되어 있다. 이는 질서와 혼돈의 이중성이 드러나는 알레고리다. 구조적 질서 속의 파괴는 세밀하게 사실주의적으로 묘사된 그림 앞에서 관람자가 이질적인 숭고를 겪게 되는 순간을 만든다.
회화의 내용적인 측면에서 벡신스키의 작품은 죽음을 노골적으로 그리면서도, 단순한 공포보다는 존재의 덧없음과 실존적 불안을 시각화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했다고 볼 수도 있으며, 죽음과 무(néant)라는 패러다임으로 작품 세계를 구축한다.
이러한 허무한 패러다임은 종말론적 풍경을 형성한다. 또한 폐허가 된 도시나 끝없는 황무지는 인류 문명의 몰락을 암시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게 한다. 벡신스키의 작품 속 황폐함은 20세기 폴란드가 겪었던 전쟁과 전체주의 경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벡신스키 자신은 작품에 “메시지를 담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감상자는 해석을 강요받지 않고, 오히려 자기 내면의 불안을 투사하게 된다. 이 점에서 그의 회화는 "열린 텍스트(Umberto Eco의 개념)"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저 파란 망토를 쓴 사람이 무엇을 보는지 혹은 읽는지 알 수 없듯이, 벡신스키의 그림에서 작가의 의도나 메시지라는 정답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디지털 게임이나 영화에서 자주 차용한 “포스트아포칼립스 미학”은 벡신스키의 이미지와 닮아 있다. 현대 사회의 무의식적 반영. 이는 그의 작품이 단순히 개인적 환상에 그치지 않고, 동시대의 무의식적 욕망과 공포를 집약하고 있음을 함의한다. 결국 벡신스키의 회화는 죽음·종말·해체라는 주제를 사실주의적 기법과 초현실적 형상으로 표현하면서, 감상자에게 숭고한 공포와 자기 성찰을 경험하게 하는 미학적 세계라 할 수 있다.
벡신스키 스스로는 자기 작품을 바로크나 고딕으로 정의했는데, 일반적으로는 초현실주의라고 평가받는다. 다만 전문 분야에서는 벡신스키와 그를 따르는 유파들을 환시미술이라 일컫는다. 본인 말로는 '꿈'을 그렸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는 모조리 제목이 없는데, 이는 화가 자신도 그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뜻을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언어로 구조화된 무의식의 표상(representation)을 드러낸 것과 같이 이성으로 온전히 수용하기 어렵다. 언어라는 기표(signifiant)로 도무지 담을 수 없는 아담의 기의(signifié)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담은 선악과를 먹기 전의 순수함을 상징하지 않는다. 그것은 수치심이라는 것을 모르는 원초적 세계의 아담이며, 이를 언어로 표현함 자체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기에 그것은 아담의 언어로써 온전히 문명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무의식의 이러한 표상이 우리에게 불쾌한 이유는 응축되지 않은 순수함 때문이다. 억압되지 않은 죄수가 죄수복을 입고 거리를 드나드는 것을 보는 것처럼, 우린 그것에 익숙지 않다. 그래서 이러한 무의식적 표상이 주는 감정이 불쾌한 것이다.
박정자, 『숭고 미학』, 기파랑,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