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nberg. C, “Towards a Newer Laocoön”
고트홀트 레싱의 『라오콘』은 근대 미학에서 예술 매체 간의 경계를 이론적으로 정식화한 중요한 출발점이다. 레싱은 시, 곧 문학을 시간의 예술로, 회화를 공간의 예술로 구분하면서, 시는 시간의 연쇄 속에서 사건과 행위를 전개하는 데 적합한 반면 회화는 하나의 순간을 응축적으로 제시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구분은 회화가 서사적 전개를 모방함으로써 자기 고유의 감각적 조건을 상실하는 것을 막기 위한 시도였으며, 매체마다 고유한 표현 영역이 존재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경계 설정은 역설적으로 이후 회화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기준점이 되었고, 회화는 다시금 문학적 요소와의 긴장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반복적으로 재사유하게 된다.
더 나아가 회화가 어떤 외부의 목적에 종속되어 왔던 역사는 레싱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의 회화와 종교 이미지는 미적 자율성을 지닌 예술이라기보다, 문자 해독 능력을 갖추지 못한 신자들이 성경의 이야기를 이해하도록 돕는 시각적 교화의 수단이었다. 이미지는 신학적 텍스트를 보조하고 설명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회화는 스스로 말하는 언어라기보다 언제나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매개로 기능했다. 이러한 기원적 조건은 회화가 오랫동안 종교, 교훈, 서사라는 외부 목적에 예속된 예술로 이해되어 왔음을 보여주며, 회화의 자율성 문제를 역사적으로 구조화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자신의 에세이에 「Towards a Newer Laocoön」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20세기 초 회화는 다시 한 번 예술 매체 간의 위계와 권력 관계가 재편되는 국면에 놓여 있었고, 회화는 또다시 스스로의 조건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린버그는 예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회화는 어떤 방식으로 자기 고유의 한계를 다시 확립할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이 에세이에서 그린버그가 제시하는 핵심 논지는, 예술이 자기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추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필연성을 해명하는 데 있다.
근대 이전 회화는 오랫동안 문학적 서사에 복무해왔다¹. 회화는 말해지는 것을 시각적으로 옮겨주는 기능에 제한되었고, 그 결과 시각 예술로서의 고유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². 보는 것의 예술이어야 할 회화는 점차 이야기의 예술로 전도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 위기의 원인은 외부에서 강제된 억압이라기보다, 회화 스스로가 문학을 지배자로 인정한 선택에 있었다.
그린버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아방가르드를 예술의 “본능적 자기 보존의 구현”으로 규정한다³. 아방가르드는 예술을 외적 목적의 전달 수단으로부터 분리하고,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리기 위한 역사적 대응이었다. 주제를 제거하고 형식을 전면화하는 전략은, 예술을 도덕이나 정치, 서사의 도구가 아닌 자율적인 실천으로 복원하려는 시도였다⁴.
회화가 스스로의 언어를 회복하기 위해 참조한 모델은 문학이 아니라 음악이었다. 음악은 재현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예술이며, 감각과 형식만으로 충분하다⁵. 그린버그에게 음악은 매체 자율성이 가장 분명하게 실현된 예술의 모델이었다. 따라서 회화 역시 음악처럼 자기 매체의 고유한 한계를 긍정할 때 비로소 순수해질 수 있다⁶. 이 관점에서 회화의 전환은 장식적 실험이나 표현 기법의 변화가 아니라, 자기 언어에 대한 근본적인 회복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아방가르드 회화는 점차 환영을 제거하고 표면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변화한다⁷. 회화는 더 이상 세계를 비추는 창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표면이며 하나의 현실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큐비즘에서 절정에 이르렀다⁸. 큐비즘은 환영적 깊이를 해체하고 회화를 물리적 평면으로 확정함으로써, 회화의 매체적 조건을 전면에 드러낸다.
그러나 그린버그는 추상을 예술의 최종 해답으로 제시하지 않는다⁹. 추상은 본질적 규범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예술이 도달한 불가피한 단계이다. 중요한 것은 추상 그 자체가 아니라, 추상을 통해 예술이 자기 자신을 다시 사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예술은 추상을 우회할 수 없으며, 오직 그것을 통과함으로써만 다음 단계로 이동할 수 있다¹⁰.
이 지점에서 그린버그의 논의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부정미학과 의미 있는 접점을 형성한다. 아도르노에게 예술은 확정된 의미를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 의미의 확정을 끊임없이 거부하는 형식이다. 아도르노가 말하듯, “예술은 현실 세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다.”¹¹ 예술은 세계를 설명하거나 화해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세계와의 불화와 균열을 형식 속에 보존한다.
또한 아도르노에게 예술 작품은 고정된 구조물이 아니라, 내부에 해결되지 않은 긴장을 품은 유기체에 가깝다. 그는 “현실의 해결되지 않은 적대들은 예술 속에서 형식 내부의 문제로 다시 나타난다”고 말한다.¹²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린버그가 말한 추상은 자율성의 완결이 아니라, 예술이 스스로를 비결정적인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통과한 하나의 형식적 국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그린버그가 말하는 ‘더 새로운 라오콘’이란 고정된 경계나 규범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이 자기 매체의 조건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갱신해 나가려는 비판적 태도 그 자체를 가리킨다. 추상 이후의 회화 역시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하기보다는, 다시금 새로운 종속과 새로운 자율성 사이에서 자신을 시험하게 될 것이다. 이미지가 다시 서사, 기술, 정치, 데이터의 영역으로 끌려가는 오늘날, 회화는 또 한 번 스스로의 조건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Towards a Newer Laocoön」은 과거의 이론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형으로 작동하는 질문—예술은 무엇에 속하지 않기 위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을 남기는 사유의 출발점으로 남는다.
1. Clement Greenberg, “Towards a Newer Laocoön”, 554.
2. Ibid., 555.
3. Ibid., 556.
4. Ibid., 556.
5. Ibid., 557
6. Ibid., 557.
7. Ibid., 558.
8. Ibid., 559.
9. Ibid., 560.
10. Ibid., 560.
11. Theodor W. Adorno, Aesthetic Theory, 32.
12. Ibid., 6.
Adorno, Theodor W. Aesthetic Theory. Translated by Robert Hullot-Kentor.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7.
Greenberg, Clement. “Towards a Newer Laocoön.” In Art in Theory 1900–1990: An Anthology of Changing Ideas, edited by Charles Harrison and Paul Wood, 554–560. Oxford: Blackwell,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