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시녀들>과 고전주의 에피스테메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은 철학서로서는 이례적으로 한 점의 회화에서 시작된다. 그는 서두에서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호출하며, 이 작품을 단순한 미술사적 걸작이 아니라 서구 지식의 구조, 즉 하나의 에피스테메(épistémè)가 가장 응축된 형태로 드러난 장면으로 해석한다. 푸코에게 이 그림은 예시가 아니라 출발점이다. 그는 “이 그림은 단순한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재현 그 자체를 재현한다”고 말하며, 회화를 통해 사유의 조건을 드러내고자 한다.¹
푸코의 분석은 시선에서 시작된다. <시녀들>에서 시선은 일방적이지 않다. 화가 벨라스케스는 캔버스 앞에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그 응시는 자연스럽게 관람자를 향한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바라보고 있는 대상은 관람자가 아니라, 관람자가 서 있는 자리에 놓여 있어야 할 국왕 부부다. 국왕과 왕비는 화면 안에 직접 등장하지 않고, 오직 뒤편의 거울 속 반사로만 모습을 드러낸다. 이로써 관람자는 묘한 위치에 놓인다. 우리는 그림을 바라보는 감상자인 동시에, 화가가 그리고 있는 피사체의 자리에 서게 된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재현하는 주체와 재현되는 대상의 경계가 이 지점에서 뒤섞인다.
푸코는 이 구조를 두고, 관람자가 “보는 만큼 동시에 보여지는 존재”가 된다고 설명한다.² 재현은 더 이상 세계를 투명하게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재현은 이미 하나의 질서이며, 시선과 위치를 배치함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게 될지를 미리 결정하는 구조다. 이 때문에 푸코는 <시녀들>을 “재현의 재현”이라 부른다. 이 그림은 어떤 대상을 묘사하기보다, 대상이 재현되는 조건 자체를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푸코의 해석에서 가장 결정적인 결론은 이 그림에 정작 중심이 비어 있다는 점이다. 화면 한가운데에는 공주가 서 있고, 거울 속에는 왕이 비친다. 그러나 이 모든 관계를 통합하는 ‘관찰자로서의 인간’은 그림 안에 고정된 자리를 갖지 못한다. 푸코는 “고전주의 시대에는 인간이 아직 지식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말하며, 인간은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일 뿐, 사유의 중심으로 등장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³ <시녀들>에서 중심 주체가 화면 밖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지점에서 푸코의 논의는 에피스테메의 문제로 확장된다. 푸코에게 에피스테메(épistémè)란 특정 시대의 사람들이 세계를 인식하고 지식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조건의 총체다. 고전주의 시대의 지식은 식물, 동물, 언어, 부를 분류하고 배열하는 데 집중했으며, 세계는 표와 질서의 체계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그 지식을 구성하는 주체, 즉 ‘인간(homme)’ 자체는 질문되지 않았다. <시녀들>에서 모든 것을 재현하는 중심이 정작 재현의 공간 안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은,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의 구조적 한계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이러한 구조는 르네상스와 고전주의의 단절 또한 암시한다. 르네상스적 인식이 유사성(ressemblance)과 상응을 통해 세계를 이해했다면, 고전주의는 차이와 질서를 통해 세계를 표로 정리했다. <시녀들>은 인물의 배치, 시선의 방향, 공간의 깊이, 거울의 반사를 통해 극도로 계산된 질서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정교한 질서의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비어 있는 자리, 즉 화면 밖의 소실점이 놓여 있다. 푸코는 바로 이 빈자리를 통해 고전주의 재현(re-présentation)이 자기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였음을 읽어낸다.⁴
그러나 이러한 푸코의 독해는 미술사 내부에서 즉각적인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그의 해석이 지나치게 인식론적이며, 작품이 제작된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해 왔다. <시녀들>은 철학적 장치이기 이전에 17세기 스페인 궁정이라는 제도적 공간 안에서 제작된 회화이며, 화가의 자화상 삽입 역시 재현의 자기반성이라기보다 궁정 내에서 화가의 지위를 격상시키려는 사회적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⁵ 특히 “관람자가 왕의 자리에 선다”는 푸코의 구조는, 왕의 서재라는 구체적 전시 맥락을 무시한 해석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스베틀라나 알퍼스의 작업은 이러한 비판을 이론적으로 정식화한 중요한 기준점이다. 알퍼스는 푸코를 직접적으로 논박하지는 않지만, 17세기 회화를 언어적·기호적 재현으로 환원하는 접근과 거리를 둔다. 그녀는 회화를 “언어가 아닌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하나의 지식 실천”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⁶ 이 관점은 재현을 담론적 구조로 파악하는 푸코의 독해와 이론적 대비를 이루며, 이후 시각문화 연구에서 푸코의 접근을 상대화하는 기준으로 기능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의 <시녀들> 해석은 오늘날까지 반복해서 읽힌다. 그 이유는 이 해석이 그림의 ‘정답’을 제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사유의 방향을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푸코는 벨라스케스의 의도를 밝히려 하지 않는다. 그는 이 작품을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한 시대의 인식 질서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증상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녀들>은 하나의 종결이자 예고다. 재현의 구조가 극도로 정교해질수록,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억눌릴 수 없게 된다. 푸코에 따르면, 이 질문이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순간이 바로 18세기 말이며, 이때 비로소 지식의 주체이자 대상으로서의 ‘인간(homme)’이 탄생한다. 푸코는 여기서 ‘인간’이라는 범주 자체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분명히 한다. “인간은 최근에 발명된 존재이며, 그 종말 또한 머지않았다.”⁷ <시녀들>은 바로 그 인간이 아직 등장하기 직전, 재현은 완벽하지만 주체는 아직 자리를 갖지 못한 세계를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이다.
요컨대, 푸코에게 <시녀들>은 단순한 회화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완벽하게 재현하려 하지만, 그 재현을 수행하는 주체는 정작 그 체계 안에 존재할 수 없다는 고전주의적 지식 구조를 한눈에 펼쳐 보이는 지도다. 그리고 이 지도를 통해 푸코는 우리가 자연스럽게 전제해 온 ‘인간’이라는 개념이 사실은 보편적 본질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등장한 매우 최근의 발명품임을 드러낸다.
1. Michel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Paris: Gallimard, 1966), 3–4.
2. Ibid., 5–6. 푸코는 관람자가 “regardé autant qu’il regarde(보는 만큼 보여진다)”고 서술한다.
3. Ibid., 312–313.
4. Ibid., 15–16.
5. Jonathan Brown, Velázquez: Painter and Courtier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6), 143–150.
6. Svetlana Alpers, The Art of Describing: Dutch Art in the Seventeenth Centur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3), 1–33, esp. Introduction and Chapter 1.
7.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398. “L’homme est une invention récente… et peut-être la fin prochaine.” (인간은 최근에 발명된 존재이며, 그 종말 또한 머지않았을 것이다.)
Alpers, Svetlana. The Art of Describing: Dutch Art in the Seventeenth Centur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3.
Brown, Jonathan. Velázquez: Painter and Courtier.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6.
Foucault, Michel. Les Mots et les Choses. Paris: Gallimard, 1966;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서울: 민음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