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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Feb 21. 2022

파레시아가 된 광대

예술가가 되고픈 대중

조선시대의 광대

  현재 음악가라 불리는 직업은 과거 조선시대에는 악사로 불렸다. 지금은 예체능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예술가라고 칭하지만, 그 당시에 그들은 대중에게 그저 즐거움을 주는 광대로써 천대받았다. 하지만 지금 예술가라 불리는 자들은 과거와는 다르게 대중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존재이다. 과거에는 천민으로 하대 받던 그들이 어떻게 지금은 존경받는 존재가 되었을까?


  신분제가 존재하던 과거에는 출신 집안 자체가 계급이 되고, 그 계급이 권력이 되었다. 그래서 노비는 아무리 뛰어난 언변과 글솜씨를 가졌어도 그의 출신 성분 때문에 멍청한 양반보다 못한 존재였다. 노비는 그의 천한 신분 때문에 옳은 생각을 가졌어도 그것을 발언할 기회조차 없었다. 하지만 신분이 높은 양반이나 서양의 귀족은 그의 신분이 그의 모든 오류를 덮어주었고, 그들만의 세상은 더욱 견고해졌다.


  하지만 근대사회에 신분제는 사라지게 되었고, 출신 집안은 가치 판단이 아닌 사실 판단의 요소가 되었다. 모두가 평등해진 사회에서는 누구든지 자신의 소신을 발언할 수 있었고, 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신분제라는 계급제도가 무너지자 광대로 취급받던 예술가들도 고귀한 양반들과 동등한 신분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파레시아

  고대 그리스에는 파레시아스테스(Parresiastes)라는 자들이 있었다. 고대 철학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소크라테스 또한 당대의 파레시아였다. 그들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는 자이다. 모든 것을 말하고,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며,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타인에게 활짝 열어 보인다. 파레시아는 3가지로 정의 내릴 수 있다. ‘진실을 말하기’, ‘위험을 감수하는 말하기’, ‘비판적 태도로 접근하기’를 지녀야 한다. 그것은 타인과의 기울어진 권력관계 속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말하기 실천을 통해 자신의 진실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태도를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가와 파레시아의 공통점

  앞에서 말한 파레시아는 쉽게 말하면 진실을 말하는 자이다. 그 진실은 파레시아가 아무리 객관적인 사람이라도 본인의 경향이나 주관이 첨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파레시아의 발언은 그의 예술이 아닐까? 시릴 모라나와 에릭 우댕의 공동 저서 "예술철학(2013)" 2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의 기능이 배설 (purgation)와 정화(purification)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화'는 인간은 존재의 더 깊은 의미에 접근하고 자신을 반성하게 됨으로써 순수하게 정화하는 것을 의미하고, '배설'은 그의 감정을 배출함으로써 그를 안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파레시아의 발언은 그의 감정을 배설하는 예술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예술가가 파레시아의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은 그의 사랑, 슬픔 등의 감정으로 작품을 만들고, 사회 혹은 정치적인 메시지도 본인의 작품에 남기기도 한다. 그래서 예술을 여러 방식으로 접하는 대중들은 여러 형태의 작품을 매개로 예술가의 감정에 공감하고 도취한다. 과거에 천민이었던 광대와는 다르게 현대사회에서는 예술가가 대중에게 소신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것이다. 과거에 광대가 자신의 소신을 말하면 아무도 듣지 않고 무시됐을 텐데, 현대에 예술가들은 반대로 대중에게 메시지를 주며 그들을 설득한다. 파레시아스테스가 왕에게 파레시아를 행함으로써 사회적 파급력을 주는 것과 같이 예술가가 그의 예술로 사회와 대중에게 파급력을 주는 것이 아닐까?

유명 예술가 앤디 워홀(Andy Warhol,1928~1987)과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1960~1988)

대중은 예술가(파레시아)가 되고 싶어 한다.

  과거에는 연예인과 일반인의 경계가 아주 명확했다. 조각 같은 외모, 명품 가방과 의류, 고급 승용차 등은 연예인만의 전유물이었다. (일부 부자들도 물론 그것들을 가졌다. 하지만 대중은 부자들보단 예술가를 통해 그것들을 접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일반인들도 조각 같은 외모를 가지게 되었고, 명품은 흔히 볼 수 있어서 희소성이 떨어졌고, 고급 승용차 또한 너무 흔해져서 희소성이 떨어졌다. 이러한 이유는 경제발전에 의한 금전적 여유도 한몫했겠지만, 나는 그들이 무언가를 동경해서 그러한 물질들을 구입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예술가 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대중은 예술가와 닮고 싶을까? 나는 그 이유를 감정의 배설로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배설을 누구보다 잘 행하는 사람이 예술가가 아닐까? 그들은 그들의 감정을 녹여서 작품을 만들고, 대중들은 그 작품을 통해 그의 감정에 공감한다. 그 작품에 공감하는 이유는 작품에 드러난 예술가의 감정이 자신이 알고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별을 모르는 사람은 이별이란 감정에 공감할 수 없다. 하지만 이별을 겪어본 자는 이별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잘 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예술가처럼 자기 검열 없이 말하고 싶어서 그들처럼 되고 싶은 것일까? 내가 실연을 당해서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면 그것은 추한 행패로 느껴질 수 있지만, 예술가가 그것을 작품으로써 표현하면 대중은 예술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 자체를 인정받고 공감받고 싶어서 예술가를 닮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페르소나에 지친 대중들이 그의 감정이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서 파레시아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참고 문헌

현자와 목자(푸코와 파레시아) - 나카야마 겐

예술철학 - 시릴 모라나, 에릭 우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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