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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Nov 15. 2022

니체의 미학

Nietzsche’s aesthetic 

쥘레 게시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삼동 아트 컨티뉴에서.

  너무나도 오랜만에 글을 쓴다. 원래 일주일에 하나 많으면 두세 개까지 글을 써 버릇했는데, 최근에 뭔 일이 그렇게 많았는지, 글을 쓰고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중간고사라는 시험도 있었고, 여러 개의 발표가 있었어서 사색하고 글을 쓸 시간이 없었다고 말하면 핑계겠지만, 진짜로 바빴다. 그래서 오랜만에 전부터 생각해놓은 글을 쓰려고 한다. 오늘 예술철학 강의시간에 교수님께서 책을 주셨는데,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 교수님 논문을 읽고 든 생각을 써보려고 한다. 사실 논문을 읽고 든 생각이라기보다는 그냥 정리에 가까울 것이다.


  예술철학과 감성치유라는 과목의 5주 차였나? 니체의 미학에 대해서 배웠다. 니체는 정말 유명한 프로이센 출신의 철학자이다. 1844년에 태어나 1900년에 죽었는데, 모더니즘에 큰 영향을 주었다. 어느 강연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는 철학자는 임마누엘 칸트이고, 가장 많이 읽히는 철학자는 프리드리히 니체라고 들었다. 그만큼 니체는 우리에게 친근한 철학자이다. 철학을 잘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는 거의 모두가 알 것이다. 개인적으로 니체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니체의 미학이었다는 것을 지난 강의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니체의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이라는 용어를 참 좋아하고, 자주 쓴다. 하지만 사실 잘 모르고 썼었다. 하지만 지난 강의를 통해서 그 의미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니체의 미학(혹은 예술철학)에 대해 다뤄보겠다.


디오니소스적 충동 : 도취

  니체는 예술을 두 가지 충동으로 나눈다. 이는 마치 플라톤이 세상을 가지계와 감각계로 나누는 것처럼 볼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 플라톤은 감각계에서 벗어나서 가지계인 이데아의 세계로 영혼을 상승시켜야 한다고 한다. 그 말은 즉, 가지계가 감각계보다 우월하며, 가지계는 열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두 가지의 충동을 우열 관계에 놓지 않았다. 서로 대립하는 관계이긴 하지만 결국 그 둘은 화해를 하며, 마치 남자와 여자의 성적 결합과 같다. 먼저 디오니소스적 충동에 대해 살펴보겠다. 디오스소스적 충동은 "도취"이다.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다. 솔직히 왜 충동이라는 말을 쓰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충동이라는 단어를 생략하고 "디오니소스적인"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겠다. 그렇다면 디오니소스적 도취란 무엇일까? 도취라고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해보니 "술에 거나하게 취함.", "어떠한 것에 마음이 쏠려 취하다시피 됨."이라고 나온다. 술의 신답게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취하는 것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면, 얼추 맞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개별자의 해체를 통해 일자화(一者化)시키는 것이다. 이게 뭔 소리인지 나도 처음엔 몰랐다. 하지만 의외의 상황에서 디오니소스를 체험하고, 그것이 진정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강의가 끝나고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간단하게 노래방을 갔다. 술을 먹지 않았는데, 노래방에 가서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다 같이 놀았다. 처음에는 발라드를 부르며 우리 모두가 개별적인 존재였다. 물론 직접 노래를 부르며 자신에게 취한 친구도 있겠지만, 우리는 각각의 개별자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왠지 모르게 신나는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노래가 신나 질수록 우리는 하나둘씩 일어나서 술 마신 사람들처럼 정신없이 놀았다. 물론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그 정신없이 노는 순간에 우리는 마치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다섯 명의 남자가 방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진짜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너나 할 것 없이 미친놈처럼 방방 뛰고, 가만히 있으면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모두가 하나가 된 것처럼 우리는 노래 부르고, 춤추고 뛰었다. 정신없이 놀다가 너무 힘들어서 노래방에서 나오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개별자의 해체인가? 이것이 디오니소스적 일자화인가?  만약에 우리가 정말 술까지 마셨다면 진정 더 디오니소스스럽게 하나가 되어서 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니체는 이러한 디오니소스적인 열광, 도취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 만약에 나쁘게 보았다면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아폴론이 디오니소스를 죽여야 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예술로 음악을 말했으며, 니체는 음악을 정말 사랑했다. 


  현대사회에서 디오니소스를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클럽에서 하나 되어 춤추는 사람들, 콘서트에서 떼창 하는 관중들, 스포츠 경기를 보며 마치 하나가 된 듯 함께 응원하는 관중들 등 우리는 여러 가지 형태로 디오니소스적인 일자화를 경험한다.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우리가 현실을 잠시 망각하고 개별화의 사슬을 부수고 타자와 하나가 되어 쾌를 느끼게 하는 그런 감정일까?


아폴론적 충동 : 꿈

  아폴론은 디오니소스와 대립되는 충동이다. 아폴론적 충동은 "꿈"이다. 꿈이라니 정말 난해한 단어 같다. 이것은 자면서 꾸는 꿈일까, 아니면 이루고 싶은 꿈일까? 나는 후자로 추측한다. 디오니소스와 반대로 아폴론은 개별화의 원리를 따르며, 동적인 디오니소스와 반대로 정적인 예술이다. 그래서 아폴론적인 예술을 니체는 조각에 비유한다. 조각을 만드는 과정은 역동적 일지 몰라도, 조각은 음악과 같이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고, 그대로 정지해 있는 정적인 예술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음악은 시간적인 예술이고, 조각과 같은 미술은 공간적인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은 연장을 가지지 않고, 시간성을 가지지만, 미술은 연장성을 가지고 시간성을 가지지 않는다. 미술품은 시간이 지나도 한결같으며, 시간이 멈춰도 미술작품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을 미분하게 되면, 음악은 존재할 수 없다. 


  정적인 조각과 같은, 꿈이라는 충동을 가진 아폴론적인 예술은 공연장에서 떼창 하는 것과 같은 디오니소스와 다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폴론적 경험은 미술관에서 조용히 혹은 잔잔한 음악을 감상하며 우아하게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모두가 다르게 그림을 해석하고, 굉장히 정적인 그런 미술관 말이다.


니체의 실존의 미학

  니체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예술을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으로 이원화했다. 하지만 플라톤과 다르게 우열을 가리지 않았으며, 그 둘 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니체는 그 둘이 공존하는 것을 미학과 어떻게 연관 지었을까? 니체는 삶을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이 하나 됨으로써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감정은 마치 롤러코스터 같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디오니소스적 충동만을 경험할 수는 없으며, 아폴론 또한 마찬가지이다. 잠에서 깨있는 상태와 잠을 자는 상태로 인간의 하루가 나뉘는 것처럼, 인간의 인생도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으로 양분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생을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으로 양분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일까? 디오니소스는 음악과 같은 것이고, 아폴론은 조각과 같은 것인데? 삶을 음악과 미술로 양분한다는 것이 대체 무슨 개소리일까? 여기서 말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음악이 아니라 개별자인 자신을 잠시 잃고, 도취하는 것을 말하고, 아폴론적인 것은 개별자로써 꿈을 꾸는 것을 말한다. 흔히들 사람들이 독소를 뺀다고 말하거나, 본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혹은 고삐 풀린 망아지 같다고 한다. 과연 그것이 나쁜 것일까? 나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삶에서 잠시 벗어나서 도취한다는 것은 마치 중학생이 학원 끝나고 게임으로 그날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과 같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공부는 아폴론적인 것이 되겠지.


  니체는 우리의 인생이 예술작품과 같다고 한다. 자기를 형성하고 극복하는 존재인 한 우리 모두가 예술가이다. 당신의 삶은 당신의 예술작품이다. 우리는 지금도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작품 활동을 하고 있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는 왜 우리의 인생을 작품이라 여기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프레타포르테(prêt-à-porter)가 아닌 오뜨 꾸뛰르(haute couture)로써의 실존

  니체는 신을 죽인 철학자로 유명한데 왜 신을 죽였을까? 나는 그 이유를 니체가 우리를 신과 신앙이라는 정해진 실존의 틀을 부수고, 각 개인을 스스로 창조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신의 존재는 인간을 예속시키고, 교리에 맞게 인간을 개조한다. 하지만 니체는 인간의 개별적 실존을 위해서 이러한 선험적 틀을 부수고, 공장에서 찍혀 나오는 공산품같이 모두가 똑같은 현실을 부수려 노력했다. 니체 이전에 인간은 모두 붕어빵과 같았다. 정해진 틀대로 만들어지고, 틀에 더 비슷하게 만들어진 인간이 더 훌륭한 인간이었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누가 더 아폴론적인지 따져서 훌륭한 인간을 판별했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개별화와 개별화의 해체를 모두 인정하며, 인간을 공산품이 아닌 수제품으로 만들려 했다. 인간은 모두 프레타포르테처럼 각자가 똑같은 기성복이지만, 니체는 맞춤 제작 의복인 오뜨뀌뛰르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신이라는 인간을 생산하는 기계를 부정하고, 인간 스스로 자신의 예술작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참고문헌 - 니체와 푸코의 실존의 미학 (강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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