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경수 Dec 04. 2022

유사와 상사

Ceci n'est pas une pipe.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1929)”

  요즘에 기말고사 기간이라 시험공부를 하고 있다. 중간과는 달리 모든 과목이 시험을 보기 때문에 할 것이 생각보다 많다. 무엇보다 내용이 어렵다. 중국철학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고, 서양철학은 오후 5~8시에 강의를 진행해서 도저히 집중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철학상담치료개론은 할만할 것 같은데, 아직 시작은 안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는 예술철학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원래 공부하고 싶었던 분야이기 때문에 더더욱 욕심이 생긴다. (다른 과목은 어떤 성적을 받던지 관심이 없는데 이건 진짜 A+를 받고 싶다.) 지난 시험에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니체, 하이데거 그리고 메를로퐁티가 시험 범위였는데, 생각보다 할만했다. 단, 메를로퐁티를 제외하고는.  무엇보다 그들의 철학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흔히들 철학을 진, 선, 미로 나누는데, 나는 그들의 진과 선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그들의 '미'에 관한 철학을 배우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엇보다 아는 철학자에 대한 강의이니 귀에 좀 들어왔다. 하지만 이번 학기는 좀 어렵다. 벤야민, 아도르노, 제들마이어, 리오타르는 이름만 주워 들어봤지 나는 그들의 사상을 잘 모른다. 무엇보다 대중적이지 않은 철학자들이기 때문에, 사상도 매우 어렵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푸코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철학자이자 가장 존경하는 철학자인데, 이 사람의 미학도 너무 어려워서 곤욕을 겪었다. 그래서 유튜브도 많이 찾아보고 관련 서적과 자료들도 보았는데, 대강 정리해보려 한다. 그리고 내 개인적 견해도 좀 넣어보려고 한다.


  르네 마그리트는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예술가이다. 그의 그림은 참 초현실주의스럽다. 현실을 뛰어넘어서 상상하기도 불쾌한 것들을 그리기도 한다. 마그리트는 하늘에서 비 대신에 신사에 떨어지는 그림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로 알려진 "이미지의 배반"으로 유명하다. 금지된 재현을 포함한 몇 개의 작품을 제외하고 마그리트의 웬만한 작품들은 모두 대중에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상상력이 풍부한 예술가가 그린 초현실주의 회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지의 배반은 어떨까? 이 글 맨 위에 있는 이 작품은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고 아래에 써놓았다. 대체 어쩌라는 것일까? 왜 파이프를 그려놓고 그것이 파이프가 아니라고 하며, 푸코는 왜 이 그림으로 책까지 썼을까?


  푸코는 예술에서 전통적 재현의 해체를 일관되게 강조했다. 그의 분석을 보면 이미지가 실재하는 사물을 충실히 재현한다는 유사성에 기반한 미메시스 개념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이러한 푸코의 의견은 그의 책 "말과 사물(1966)"을 생각나게 한다. 푸코의 이 책은 광기의 역사와 달리 동일자의 역사를 추적한다. 푸코는 이 책에서 르네상스부터 근대의 유럽을 연구하는데, 시대를 크게 르네상스, 고전주의 시대, 근대 세 개로 나눈다. 그리고 각 시기별로 지식이 참이 되게 하는 조건인 '에피스테메(episteme)'라는 무의식적 인식틀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르네상스에는 '유사'를 고전주의 시대에는 '재현'을 근대에는 '역사 혹은 인간'을 에피스테메로 삼으며, 이것들로 인해 지식이 규정된다는 것이 푸코의 말과 사물의 주된 내용이다. 나는 푸코가 전통적 재현의 해체를 강조함을 보고서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인 '재현'에서 벗어나 근대시대로 넘어가는 지식의 지층의 단절로 인해서 예술 또한 새로운 에피스테메를 받아들였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즉 회화에도 무의식적 인식틀인 에피스테메가 적용된다고 주장한 것으로 이해했다.


  푸코는 유사와 상사라는 개념을 이야기했다. 유사는 원본과 복제 사이의 닮음의 관계를 의미하고, 상사는 복제와 복제 사이의 닮음의 단계를 의미한다. 유사란 마치 이데아와 현실세계와 같다. 현상계인 현실세계는 예지계인 이데아의 세계의 모방에 불과하다. 따라서 똑같은 사과가 있어도 유사의 관점에서 보면, 사과의 이데아와 더 '유사'한 사과가 더 좋은 사과가 된다. 따라서 유사 관계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원본에 더 충실한 것이 옳고, 좋은 것이 되며, 그렇지 않은 것은 틀리고, 나쁜 것이 된다. 반면에 상사는 복제와 복제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이들 사이에는 이데아와 같은 원본이 없으며, 우열을 가리지 않는다. 유사는 원본의 존재를 전제로 원본과의 관계하에서 중심을 향해 위계적으로 정돈되지만, 상사는 굳이 원본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중심을 향해 정돈되지 않는다.


  상사라는 개념은 과연 푸코답다. 푸코는 권력에서의 탈예속화를 주장하며, 말년에는 자기의 윤리에 대해 연구했는데, 푸코는 인간이 스스로의 예술작품이라고 얘기했다. 인간이 예술작품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내가 이해한 바로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과 같은 이름만 인간인 주체성을 상실한 존재가 아니라 장인이 직접 빚은 도자기와 같이 공들여서 스스로를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것 같다. 그래서 푸코의 미학 언어로 그의 주체철학을 설명하자면, 우리는 유사가 아닌 상사로서 이 세상의 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 권력과 절대적 진리의 해체와 미시 권력을 이용한 생명 정치를 폭로한 푸코는 타자의 동일자화를 강요하는 권력에 맞선 철학자이다. 그래서 그에게 이데아란 없는 것과 같다. 플라톤 철학을 누구보다 공부한 푸코이지만, 푸코는 플라톤 철학과 반대로 가는 것이다. 플라톤은 절대 계급을 선언하고, eidos의 수량화로 만물의 우열을 나누었으며, 절대적인 무언가 인 '이데아'를 주장했는데, 푸코는 절대적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고, 모든 당연한 것은 권력에 의해 누적된 지식일 뿐이라고 폭로한다.


  다시 마그리트 그림으로 돌아가면, 푸코는 '이미지의 배반'을 통해서 유사에게는 '주인'이 있으며, 지시하고 분류하는 제1의 참조물을 전제한다고 한다. 근원이 되는 요소가 있고 그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연속적으로 복제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사물들은 근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약화되어, 그 근원 요소를 중심으로 질서가 세워지고 위계화된다고 한다. 하지만 상사는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면서 퍼져나가는 계열선을 따라서 전계 된다.


  그림 속의 파이프는 파이프의 이데아가 아닌 파이프를 그렸다. 즉, '상사(simulacre)'한 것이다. 그래서 파이프는 본질에 충실한 것이 아니다. (아니 잠깐 본질이라는 것이 존재는 하는가?) 그래서 유사가 아닌 상사를 한 이 파이프는 본질에 충실해야만 우월한 작품인 것이 아닌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서열에 복종하지 않는 자유로운 작품이다. 그런데 우리는 파이프를 보고 파이프가 아니라 하는 저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비판하고 조롱할 자격이 있는가? 이는 마치 자유롭게 사는 자유지상주의자를 보고서 남들과 다르니 틀린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라 비난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네이버 블로그

이전 03화 니체의 미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