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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Apr 13. 2023

하이데거와 현대 미술

고흐의 구두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 "끈이 달린 구두(1886)"

  요즘에 하이데거를 공부한다.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데, 너무 얕게 아는 것 같아서 공부할 필요성을 항상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논문투고도 끝났고 해서 하이데거를 공부하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정말 중요한 철학자 중에 한 명이다. 누구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라고도 하더라. 하지만 많은 철학자에게 영향을 줬다고 해서 그의 사상이 결코 접근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우선 하이데거는 이음동의어를 많이 사용한다. 언제는 존재자라고 하고, 언제는 현존재라고 하고, 아무튼 하이데거책의 용어는 참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존재와 시간(1927)' 번역본을 직접 읽기보다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해제본들을 찾아서 읽었다. 해제본을 봐도 뭔가 명확하게 이해가 되진 않았다. 대충 뭘 말하고자 하는지는 이해가 되는 듯 하나, 그걸 내가 말로 설명하거나 글로 쓰라고 하면 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영감은 찾아온다. 


하이데거와 예술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를 생각하면 '존재'라는 개념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하이데거 이전에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은 존재(있는 상태)에 대한 철학만을 사유했고, 존재자(있는 것)에 대한 사유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만 사유를 하고, 존재하는 것에 대해선 사유를 중점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존재의 철학자답게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에 대해 논할 때도 존재개념을 언급한다. 하이데거가 말하길 예술의 본질은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 속으로 스스로 정립하고 있음을 나타는 것이라고 한다.


  그전에 먼저 다뤄야 할 개념이 있는데 그건 사물과 인간과의 관계이다. 칼은 누가 들고 있느냐에 따라 용도가 다르다. 요리사가 칼을 들고 있으면 그건 요리를 위한 도구이고, 범죄자가 칼을 들고 있다면 그건 흉기이고, 대장장이가 칼을 들고 있다면 그건 그의 작품처럼 느껴질 것이다. 분명히 같은 칼인데 왜 들고 있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사물이 되는 것일까? 요리사가 칼을 들면 참치회를 떠줄 것 같아서 군침이 돌고 기대가 되는데, 범죄자가 칼을 들고 있으면 나에게 해를 가할까 봐 두렵다. 같은 칼인데도 다른 느낌을 주는 이유는 존재와 사물 사이에 형성된 관계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가장 와닿는 부분은 개인적으로 피투성(thrownness, 被投性)이다. 피투성은 우리가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즉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는데도 우리가 이미 세계 속으로 던져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에게 본질이란 없다. 하지만 사물의 경우 인간이 작정하면 본질이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도로에서 타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배는 물 위에서 타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인간의 경우 해군이 될 수도 있고, 육군이 될 수도 있고, 공군이 될 수도 있는데, 배는 물에서만 배의 역할을 할 수 있고, 자동차는 육지에서만 자동차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물의 본질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칼은 본질이 뭘까? 분명 무언가를 자르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자르는 게 생선일 수도 있고, 고기일 수도 있고, 여러 대상을 자를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칼의 본질은 무언가를 자르는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칼이라는 사물과 관계를 맺는 존재의 성격에 따라 칼의 텔로스(telos)는 달라질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요리사나 장인에게 칼을 주면 도구가 될 것이고, 범죄자에게 주면 흉기가 되는 것처럼. 


  다시 예술철학으로 돌아와서, 하이데거가 말하길 예술의 본질은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 속으로 스스로 정립하고 있음을 나타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무슨 말일까? 나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정의를 보고 예술작품이 존재자의 실존의 연장으로서 그의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존재자가 창조하는 예술이란 그의 세계인데, 그는 창조하는 과정에서 그의 고의와 의도를 남김으로써 그의 진리를 남기는 동시에, 본인의 작품을 창조함으로써 실존의 연장체를 만드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이 자신을 세우게 되는 그곳을 대지(erde)라고 하는데, 그에 따르면 예술 작품은 존재의 의미를 품지만 그것을 감추고 있을 때는 대지이며, 그것을 열어서 드러내 보일 때는 세계가 된다.

  

  '존재자가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는지'의 의미를 밝힌다면, 작품에서 '진리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작품은 존재의 진리를 보여준다. (현대미학 특강, 이주영 지음 中)


  따라서 작품(예술 작품)이란 존재자(예술가)가 창조한 정합적인 것이며, 그것은 존재자의 진리를 담고 있다. 그 진리를 감추고 수수께끼의 대상일 때 그것은 대지일 뿐이지만, 그 진리를 드러내고, 작품에서 진리를 발생된다면 그것은 세계가 된다. 그렇다면 존재자 혹은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서 본인의 실존을 형체로 남기는 것뿐 아니라 작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존재자 본인을 세상에 기투하는 것은 아닐까?


하이데거 미학과 현대 미술

마르셀 뒤샹(1887~1968)  - "샘(1917)"

  현대미술 얘기를 하면 뒤샹의 샘은 빠질 수가 없다. 이 작품 얘기가 빠졌다면 그 대화는 뒤샹 이전 까지만 논했거나, 뒤샹 이후만 논한 것일 것이다. 그만큼 뒤샹의 저 작품은 미술사에 큰 획을 그었다. 처음에 뒤샹이 리차드 무트라는 가명을 써서 저 변기를 작품으로 내놓았을 때는 작품취급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뒤샹의 자작극임이 밝혀지자 저 변기는 큰 주목을 받게 되며 예술작품으로 칭송받는다. 그저 공산품 변기에 뒤샹이 사인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위의 작품처럼 뒤샹의 굉장히 다다이즘적인 혁신은 나는 미술계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품이란 원래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작가가 직접 만들어서 그 형체를 이루어야 진정한 작품이라 인정을 받았는데, 뒤샹 이후로 작품의 제작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과거처럼 작품이 무엇을 보여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가 중요해진 것이다. 따라서 작품과 작가의 권력관계의 헤게모니가 작품에서 작가에게로 갔다고 볼 수 있다. 


  작품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작가의 의도가 중요하다는 점이 뭔가 하이데거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하이데거의 미학에 따르면 존재의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 작품이지, 존재와 현상학적 유사성을 띄는 것이 작품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예술작품의 정의와 뒤샹 이후의 현대미술이 함의하는 정의는 어느 정도 교점이 있지 않을까? 결국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이데거에게 작품이란 존재자의 실존의 연장이고, 그 연장은 존재자의 의도로 인해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난해한 현대 미술을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변기처럼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할 무언가도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다시는 뒤샹의 작품과 같은 아우라를 품은 진정한 예술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하게 된다. 뒤샹의 샘이 뒤샹의 연장이자 작품인 이유는 그가 미술계에 큰 획을 그었기 때문이다. 최초라는 점이 저 변기를 작품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대체 사물에 진리를 담는다는 것은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일까. 내가 무슨 작정을 하고 무언가에 의도를 가한다면 그건 다 작품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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