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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May 02. 2023

예술의 아우라는 어디로 갔는가

Walter Benjamin's aesthetic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

  예술은 시간이 흐를수록 대중과 가까워진다. 그 이유에는 아마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과거에 비해 대중의 경제적 사정도 여유로워졌고, 대중 매체의 보급과 발전으로 예술에 접하는 것이 굉장히 용이해졌다. 예전보다 더 나은 환경으로 인해 대중이 예술에 관심을 더 가지게 되고, 접근하기 쉬워진 것도 큰 요인이지만, 나는 허세도 한몫한다고 본다. 물론 그 허세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나도 허세로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인류가 원시시대를 겪고, 중세를 겪고, 고전주의 시대를 겪고, 근대를 겪고, 현대에 도달하면서 지속적으로 변화한 것처럼, 예술도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변화해 왔다. 큐비즘, 추상표현주의, 인상주의 등 수많은 사조들이 계속 생겨났고, 지금도 생겨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 가장 큰 변화를 꼽자면 카메라의 등장일 것이다. 과거에는 사진기술이 없어서 무언가를 시각적으로 남기려면 화가가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하지만 카메라의 등장으로 더 이상 현실과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물론 극사실주의와 같은 사조가 카메라의 출현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지만, 기존의 회화의 본질인 재현이 더 이상 무의미해졌다는 것이 그전에 비해서 큰 변화이다. 


  사진은 그림과 다르게 한번 촬영하면 여러 장을 인화할 수 있다. 그림은 같은 그림을 동시에 두 개를 그려도 완전히 똑같을 수가 없다. 두 장이 동시에 원본일 수는 있겠으나, 그 둘이 완전히 같은 그림일 수는 없다. 기계가 아닌 인간이 과연 같은 그림을 두 번 그리더라도, 완전히 똑같이 그릴 수 있을까? 

  그림은 두 장을 그리려면 한 장에 비해서 두 배의 작업시간이 소요되는데, 사진은 작업시간이 늘어나지 않는다. 인화시간은 더 걸리는지 모르겠지만, 그 작품을 렌즈에 담아내는 시간은 1장을 인화하든, 100장을 인화하든 똑같다. 


  따라서 재현에 충실했던 고전 예술은 위기를 겪게 된다. 마치 AI나 키오스크로 인해서 일자리를 빼앗기는 현대인처럼 미술도 카메라(복제기술)의 등장에 의해서 그 존재가 회의적이게 되었다. 재현이 목표라면 왜 그림을 의뢰하겠는가. 사진을 찍으면 되는데.


예술작품과 아우라

  벤야민은 아우라(Aura)를 말한다. '아우라'란 원작을 감싸고 있는 영기를 가리키는데, 벤야민은 이를 "자연대상의 분위기"에 비유한다. 요즘에도 아우라라는 말은 자주 들린다. 길 가다가 어떤 배우를 봤는데, 역시 배우는 아우라가 남다르다... 평소엔 그냥 그랬는데, 노래를 부르니 아우라가 다르더라... 역시 진품은 아우라가 달라... 등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게서 아우라를 느낀다고 말한다. 그 아우라란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앞에서 예술작품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예술작품을 통해서도 물론 아우라를 우리는 느낀다.

  개인적으로 아우라를 느낀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앤디 워홀 작품을 직접 보기 전에는 그냥 인쇄물에 불과한 줄만 알았다. 모니터를 통해서 본 그 작품은 나에게 그저 도트로 형성된 jpg파일에 불과했다. 크기는 당연히 모니터보다 작고, 색감은 디스플레이와 촬영 환경에 의해서 변조되었던 그냥 그림 파일에 불과했다. 이때 나는 아우라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우라는커녕 작품으로 조차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청담동에서 실제로 그 작품을 접하니 모니터에서 느끼지 못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나는 원래 워홀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크게 기대하지 않고 전시회를 갔다. 왜 워홀을 별로 안 좋아하냐면, 워홀의 작품이 과연 예술 작품인가? 하는 의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작품이 맞았다. 그 작품과 같은 공간에, 같은 시간대에 그 작품과 존재했기 때문에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평소에 모니터에서 본 작품은 복제품에 불과하고, 실제로 청담동에서 본 작품이 진품이기 때문일까? 



진품성과 복제품

  벤야민은 복제의 고유성을 인정한다. 가령 '진품성'이라는 개념은 위조 앞에서는 힘을 발휘해도 복제 앞에서는 무력하다. 동시상영되는 영화예술에는 아예 원작이 없다. 게다가 복제는 원작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작품의 진품성은 그 사물의 '지금, 여기'와 결부되어 있기에 아무 때나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복제는 원작의 시간적, 공간적 현존성을 위협한다. 이로써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은 예술작품의 진품성,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사물의 권위이다.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中]


  진중권 아저씨가 말한 것처럼 기술복제시대에 진품의 진품성은 위험에 놓이게 된다. 진품은 그 장소에 그대로 있지만, 복제품은 어디에든 있을 수 있으며, 복제품은 서로 상사관계에 놓이게 되어 권위의 차이도 없다. 모두가 오리지널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어쩌면 하나의 진품을 파는 것보단 100개의 복제품을 파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아우라는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이라고 한다. 하지만 복제기술은 이 '일회적 나타남'을 파괴한다. 그것은 일회적 산물을 대량 제조된 산물로 대치시키고, 그로써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머나먼 일회적 나타남아무리 멀리 있어도 어떤 가까운 것의 반복적 나타남으로 바꾸어 놓는다. 유명 배우를 예로 들어보자. 디지털이 아예 없는 아날로그 시대라고 가정해 보자. 그 시대엔 TV, 넷플릭스, 유튜브 등 송출되는 영상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배우를 보고 싶다면 직접 대면으로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그 배우라는 존재를 어쩌다 만난다고 가정하면, 그는 나와 아무리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어도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듯이 머나먼 존재일 거이며, 일회적 나타남일 것이다. 그 경우 그 대면은 얼마나 경이롭고, 그 배우에게 아우라를 느낄까? 

  반대로 이번에는 완전히 디지털화된 사회라고 가정해 보자. 매체가 너무나도 풍성해서 어떤 작품이든 원한다면 클릭하나로 접근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원할 때면 언제든 그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 영화, 예능, 다큐멘터리 등 수많은 영상을 접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그 배우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어떤 가까운 존재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엄청난 덕후라서 그 배우를 24시간 내내 틀어놓는다는 괴상한 가정을 하자면, 그 배우는 나에게 아주 가깝고, 심지어 만난 적이 없어도 친근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엔 진품과 마주하는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엔 아우라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엔 진품이 아닌 접근이 용이한 복제품을 마주하는 경우이다. 현대 사회는 아마 후자에 가깝겠지?


  나는 현대사회에 아우라가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우라를 느낄 상황은 언제든지 생길 수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상황은 아우라의 특성처럼 일회적 나타남일 것이다. 현대인은 과도하게 많은 정보를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데, 그 말은 진품이 아니라 복제품을 더 많이 접한다는 얘기다. 벤야민은 아우라의 붕괴를 긍정적으로 본 모더니스트이다. 근데 나는 다르게 벤야민과 다르게 해석해보고 싶다. 벤야민이 1940년에 죽었으니 그의 이론들은 아마 현재 2023년보다 많게는 100년 전 이야기이니 사회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복제기술에 대한 그의 이론들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본다. 특히나 모니터에 빨려 들어갈듯한 현대인들에게.


  현대에 아우라는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은 모니터에 눈을 맡기고, 에어팟에 귀를 맡기는데 대체 어떤 예술을 통해서 우리는 아우라를 느끼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까? 너무나도 익숙해진 과거의 숭고와 아우라로 인해서 우리가 더 큰 역치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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