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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Jun 18. 2023

존재자의 자기 증명

우리는 왜 노력하는가

Maurizio Cattelan(1960~) - "코미디언(Comedian, 2019)"


왜 내가 하면 지랄이고 남이 하면 예술인가

  평범한 바나나를 덕트 테이프로 붙여놓고 이름을 붙였다. 그랬더니 엄마가 등짝을 때린다. 난 예술을 한 건데 엄마는 먹을 거로 장난친다고 혼낸다. 그래서 내 예술을 설명하고 증명하려 노력했다. 그래도 엄마는 내 작품을 예술로 쳐주지 않는다. 왜 마우리치오가 바나나에 테이프를 붙이면 전시가 되고, 내가 그러면 엄마한테 등짝을 맞을까? (난 바나나에 테이프를 붙이고 예술이라 우긴 적이 없다. 앞에서 말한 사건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사고실험이다.)


  분명히 누가 봐도 캔버스에 물감만 대충 휙휙 뿌린 것인데, 가격은 천억이 넘고 사람들은 그 작품을 못 사서 안달이 난다. 아마 수행평가나 방학숙제가 귀찮은 잼민이 가 그런 것을 작품이라고 제출한다면 선생님한테 혼날 것이다. 근데 왜 잭슨 폴록, 게르하르트 리히터, 마크 로스코 같은 사람들이 그러면 수백억의 가치를 갖는 예술작품이 될까? 심지어 뒤샹은 공산품인 소변기에 서명만 했는데, 그 '샘'이라는 작품으로 미술계를 완전히 흔들 정도로 큰 파급력을 보여줬다. 대체 뭐가 그 소변기를 미술사에 길이 남을 작품으로 만들고, 흩뿌려진 물감 덩어리들을 수백억짜리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인가.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주 아감벤은 코로나 팬데믹 중간에 '얼굴 없는 인간'이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그 작품의 내용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급진적으로 말해서 코로나 자체를 음모로 보는 그의 견해를 직설적으로 펼치는 책이었다. 이 얼굴 없는 인간이라는 작품의 영향으로 아감벤의 쇠퇴를 말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는 한 종교인이 있다. 그는 신앙으로 코로나를 물리친다고 하고 방역수칙을 위반하고 종교활동을 강행한다. 그러자 정부는 즉각 그들을 감염병 방역수칙 위반으로 규탄하고, 국민들도 그들을 비판했다. 아감벤이 말하는 코로나 음모론은 사람들이 학술적인 연구로 봤다. 하지만 한 종교인은 그저 미치광이 방역법위반자로 취급받았다. 물론 아감벤은 펜을 들고 글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고, 종교인은 직접적으로 법을 어기며 그의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결국 둘 다 코로나 팬데믹이 사기이고, 음모일 뿐이라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근데 왜 아감벤의 주장은 학술적 연구가 되고, 그 종교인의 주장은 헛소리며 음모론일까. 


존재자의 자기 증명

  한국에서 학생들은 명문대에 가기 위해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학원에 다닌다. 그들은 왜 명문대에 가려고 할까. 그건 아마 명문대생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우월하다고 암묵적으로 취급하는 사회적 풍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명문대생이 더 우월하지? 그건 학창 시절에 공부를 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공부를 잘했다는 사실이 명문대생을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더 우월하게 만드는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은 그저 하나의 팩트일 뿐이지만 그에게 더 많은 권력을 가지게 한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고,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처럼 그의 과거(혹은 경험)가 그의 현재를 보증해 준다. 따라서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를 간 학생이 하는 말이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더 공신력을 가지게 되고, 그 공신력 차이는 명문대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사이의 권력관계를 형성한다. 즉, 명문대생은 자신의 학벌 단 하나로 자신의 학창생활 12년을 보증받는 것이다. 다르게 말해서 자신의 성실함, 영민함, 똑똑함 등을 대학교 간판으로 자기 증명하는 셈이다. 


  반면에 흔히들 지잡대라고 하는 대학의 학생들은 대학교 이름을 말해도 사람들이 그에게 공신력을 주지 않는다. 그가 아무리 열심히 살고, 특출 나게 무언가를 잘해도 그는 대학교 간판으로 자기를 증명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남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 명문대생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학창 시절에 열심히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카르마(Karma) 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학 이름 혹은 그를 증명해 주는 어떤 담론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 그저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람을 사귈 때 그의 전체를 서서히 알아가기보단, 존재를 증명해 주는 몇 개의 담론들로 그를 쉽게 평가하고, 성급하게 일반화시킨다. 그래서 명문대생이 모든 면에서 지잡대생보다 나을 것이라 판단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긴 열심히 살아야지. 하지만 목표와 방향도 없이 열심히 사는 건 그렇지 못한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이루고 싶은 목표를 세워야 하고, 그 목표에 어떻게 도달할지 궁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대학원에 가고 싶다면 어디를 갈지 정하고, 가고 싶은 대학원의 모집요강에 맞춰서 입시를 준비하면 된다.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는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하고. 결국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 자리에 적격의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인 것 같다. 결국 시험을 준비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 과목을 충분히 이해한 존재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행위이다. 그리고 좋은 학교에 가려는 이유도 본인이 그 학교에 갈 만큼 충분히 인재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 같다. 결국 존재자의 자기 증명이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자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외모를 꾸미고, 자기 계발을 하고, 인스타그램에 자기의 잘난 일상을 올린다. 어쩌면 그 자기 증명의 욕망을 채운 다는 건 본인 스스로의 내재적 욕망이 아니라 우리가 사회적 존재이기에 무의식적으로 생긴 욕망이 아닐까. 라캉의 말처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앞의 작품들은 왜 작품인가

  왜냐하면 마우리치오 카텔란, 게르하르트 리히터,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이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이 그 작품들을 보증한다. '샘'이라는 작품이 뒤샹의 작품인 것을 그가 죽을 때까지 밝히지 않았다면 그건 결코 작품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작품이 되었어도, 지금 만큼의 파급력은 없을 것이다. 


  결국 자기를 증명한 예술가가 만든 작품이기에 그 물감덩어리, 바나나 그리고 소변기는 작품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를 증명하는 예술가가 되는가? 그건 본인이 생각해라. 나도 나를 증명하는 방법을 모르는데 어떻게 내가 그걸 당신에게 알려주겠는가. 하나 팁을 주자면 세상에 부딪쳐라. 기회가 있다면 다 잡아라. 그러다 보면 자기의 존재를 증명할 결과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내 사유를 증명하기 위해서 논문을 쓰고,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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