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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Sep 16. 2023

헤테로토피아와 차연

존재 양태의 변화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 - 빨간 초승달 (The Red Crescent, 1969) 

칼더의 모빌

  알렉산더 칼더는 공학을 전공한 예술가다. 흔히 영아를 육아할 때 많이 쓰는 모빌의 원조가 바로 칼더이다. 칼더의 집안은 대대로 예술가집안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예술에 익숙했으며, 어머니에게 미술교육을 받고, 대학생 시절엔 외주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더가 예술을 시작할 당시는 키네틱 아트(Kinetic art)가 유행했다. 공산품 변기를 작품으로 만들어 예술계에 큰 충격을 준 뒤샹 또한 '자전거 바퀴'라는 작품을 1913년에 공개하면서 키네틱 아트에 영향을 미쳤다. 


  키네틱(Kinetic)은 스태틱(Static)의 반대다. 흔히 우리는 이 단어를 학창 시절 공통과학을 통해서 들었다. 일반 물리학에서 키네틱 에너지는 운동 에너지이고, 스태틱은 위치 에너지를 의미한다. 예술에서 스태틱 아트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나 우리가 흔히 미술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올리는 가만히 있는 예술작품들을 일컫는다. 반면에 키네틱이라 하면 움직이는 작품이다. 지금은 뒤샹의 자전거 바퀴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작품이 없는데, 키네틱 아트는 그 자체로 충분하고, 꽉 찬 작품이 아니라, 움직임을 통해서 자신의 작품성을 실현하는 예술이다. 


  칼더가 모빌을 고안하기 전까지 키네틱 아트는 뻔한 패턴이 보이는 예술이었다. 마치 푸코의 진자처럼 단조로운 운동 루틴이 있었는데, 칼더는 그 루틴을 깨고 싶었다. 예술이 어느 틀에 맞춰져서 정의되는 게 싫었을까? 아니면 그 당연한 것들을 깨부수고 새로운 선구자가 되고 싶었는지는 내가 알 수 있는 범위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이과생인 칼더는 자신이 공부한 공학을 자신의 예술에 녹여낸다. 동력을 통해서 일정하게 움직이는 '결정론적인 키네틱 아트'를 끝내고, 바람이나 사람의 손길 등으로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조각인 모빌을 칼더는 구현해 낸다. 칼더의 이러한 작품은 두 가지 면에서 혁신적이었다. 우선 기존의 키네틱 아트와는 다르게 일정한 운동이 아닌 불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예술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뒤샹의 자전거 바퀴는 물론 정해진 시간에 바퀴가 돌아가는 그런 작품은 아니지만, 그 바퀴를 돌렸을 때, 그 운동은 예측가능하다. 이 운동을 그래프로 그린다면 굉장히 정형적인 그래프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칼더의 작품은 그렇지 않다. 칼더의 작품은 그래프가 불규칙적이고, 무게가 가볍기 때문에 가벼운 바람에도 움직이는 작품이다. 따라서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 그러한 예술작품이다. 원래 키네틱 아트라는 것이 인위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묘미인데, 칼더는 모빌을 만들 때 가벼운 소재를 사용해서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않아도 작품이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두 번째 혁신은 받침대에 관한 것이다. 기존의 조각은 모두 받침대가 있어서 바닥에 의존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이나, '원반을 던지는 사람'같은 작품은 다 바닥 위에 놓여있다. 중력 때문에 이는 어쩔 수 없는 애로사항이다. 어떻게 그 무거운 대리석 조각을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하겠는가. 

 

  하지만 칼더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던 이 점에서 자유로워졌다. 그의 조각(모빌)은 바닥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천장에 붙이는 것이다. 그의 조각은 소재가 기존의 조각품들과는 다르게 아주 가볍고, 부피가 작기 때문에 기존 작품들과는 다르게 중력으로부터 다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


  칼더의 예술은 어쩌면 구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했던 한 현존재의 사유가 미학적으로 발현된 것은 아닐까? 매일 똑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고 쳇바퀴 같은 일상이 계속되던 사회인의 일탈에 대한 욕구를 모빌과 같이 볼 수 있지 않을까? 칼더는 결국 너무나도 당연해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법칙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구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데리다의 차연

  언어학자 소쉬르는 하나의 기표와 기의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우연적인 것이라 말한다. 즉 사과는 무조건 빨갛고 동그란 과일의 기표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사과를 사과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운 건 하나의 사회적 약속이며, 이는 타자와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 


  우리의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오경수인 이유도,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지어줘서 그런 것이다. 작명은 우연적인 것이며, 사회적 약속이다. 그리고 소쉬르는 결국 기표와 기의의 우연성은 차이에 의해서 드러낸다고 말한다. 사과, 배, 수박이 있을 때, 사과가 사과인 이유는 배와 수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집에서 아들인 이유는 우리 가족 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소쉬르의 입장에 한발 더 나아간다. 데리다는 이러한 차이가 끊임없이 무한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내가 오경수인 이유는 오경수가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만이 아니라, 오경석이 아니고, 오지수가 아니고, 이경수가 아니고, 김경수가 아니고,.. 가 아니고,.. 가 아니고... 이런 식으로 무한히 차이가 발생한다. 이때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지연된다. 그래서 데리다는 라캉이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을 제창하듯이 기표와 기의의 온전한 결합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데리다는 차연(differance)이라는 개념을 고안한다. 차연은 차이(difference)의 어미 ‘-ence’를 ‘-ance’로 바꾸어서 만든 것으로, 그의 해체적 반인식론(anti-epistemology)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련어들을 지칭하기 위한 독특한 조어이다. 이 관련어에는 ‘다르다(differ)’라는 의미와 ‘연기하다 ·지연시키다(defer)’라는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는 프랑스어 ‘differer(디페레)’가 포함되어 있다. 즉 ‘differance(디페랑스)’는 동음어인 ‘differer(디페레)’가 결합되어 만들어졌음을 알리기 위해 어미 ‘-ence’를 ‘-ance’로 바꾼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차연 [差延] 참고

  결국 정의란 무한한 차이와 완성의 지연으로 인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정의는 실존의 본질이 될 수도 있고, 희망일 수도, 사랑일 수도 있으며,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헤테로토피아는(hètèro-topie)는 다른(heftero)과 장소(topos)의 합성어로, 푸코가 창조한 개념이다.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장소이다.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계급이 철폐된 유토피아도 불가능한 곳이고, 모두가 A+ 학점을 받는 대학교도 불가능하고, 모두가 왕인 세상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현존하는 공간이며 동시에 이질적인 공간에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은 도서관이 될 수도 있고, 집창촌이 될 수 있으며, 어디든 될 수 있다고 푸코는 말한다. 평일엔 일하고, 주말에 운동장에서 조기축구하는 사람에게는 그 운동장이 헤테로토피아일 수 있고, 고된 노동을 마치고, 술 한잔 하는 사람에게는 그 술집이 헤테로토피아일 수 있다. 이처럼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적이지 않은 곳이지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은 기간제 유토피아와 같다.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한정적인 시간 안에서만 그곳에 존재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 원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마치 존재의 해우소와 같다고 해야 할까.


  사실 '헤테로토피아(1966)'을 읽은 지 오래돼서 내가 맞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공간이며, 우리는 일상 속에서 그와 비슷하며, 일상에서 한정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헤테로토피아를 갈망한다. 대학생은 강의가 끝나고 술 먹으러 가고, 직장인은 원하는 것을 배우러 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길 원한다. 헤테로토피아란 결국 도달할 수 없는 이데아의 재현이 아닐까?


헤테로토피아의 차연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결국 우리 인생의 헤테로토피아는 계속 차연 된다는 것이다.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도 결국엔 죽음이나 이별을 통해서 온전한 유토피아가 되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것에 도달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결국 또 다른 것을 희망하게 된다.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다. 의사가 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불행할 수 있고, 원하는 공부를 하게 되어도 만족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면 다시 새로운 원하는 것이 생기고, 그것을 이루면 또다시 다른 원하는 것이 생긴다. 이렇게 욕망은 계속 다른 헤테로토피아를 갈구하게 되지만, 그 헤테로토피아는 차연 된다. 어쩌면 인간에 대해 실존주의가 한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유를 선고받았기 때문에 불안하다고. 존재의 본질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차연적인 삶을 사는 걸 지도 모른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일까. 


  그렇다면 이 욕망과 차연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인생을 계속 돌아서 가는 것만 같고, 줏대 없이 추구하는 것이 계속 바뀌는 느낌이라면 그 현존재의 실존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인간의 본질은 무(néant)라고 말하는 사르트르의 사상처럼 그냥 본질이 없기 때문에 선택만 계속해나가면 그것이 현존재의 실존인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현재를 사는 존재에게 다음의 선택은 무엇이며, 그 선택 다음의 차연은 또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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