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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Oct 06. 2023

이데아와 미학

어쩌면 플라톤 미학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 피에타(1498~1499)

  성모 마리아가 죽은 아들 예수를 안고 있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어린아이가 아니고 서른 살이 넘은 아들이 어머니보다 체구가 작다. 또한 누군가는 어머니가 장년의 아들을 둔 것치곤 너무 젊어 보인다고 말한다. 성스러운 장면을 재현한 이 작품을 너무 학문적으로 따진다면 종교인들이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플라톤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작품을 꼭 언급한다. 이 작품과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은 플라톤의 『국가』10권에서 간접적으로 나오는 그의 미학에 대해서 논할 때 나에게 필수불가결한 작품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두 명작은 플라톤에 의하면 '선'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폐기되어야 할 작품이다. 이제 그 이유를 알아보자.


침대의 이데아

  우리가 자는 곳인 침대는 과연 완전하며, 그 자체로써 충분한 존재일까? (여기서 침대를 충분하지 못한 존재로 언급한다고 해서 침대를 대자존재로 보는 것은 아니다. 사르트르의 철학과는 별개로 봐주길 부탁한다.) 감각계에 있는 침대는 그렇지 못한 존재이다. 우리가 만지고 눕는 침대는 불완전한 사물이다. 이 침대는 가짜다. 진짜는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침대의 이데아이다. 감각계에 있는 이 침대는 그저 침대의 이데아를 흉내 낸 복제품에 불과하다. 따라서 원본의 복제품에 불과한 감각계의 사물들은 이데아계에 있는 그것들보다 열등하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침대를 회화로 그린다면 어떨까?

감각계의 어느 허름한 침대와 고흐의 회화(고흐의 방)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의 사진과 그림 중에 더 아름다운 것을 골라야만 한다면 오른쪽을 고를 것이다. 왼쪽 침대는 뭔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쪽방촌이나 고시원에 사는 사람의 침대와 같이 느껴지고, 오른쪽 그림은 어느 예술가가 그린 아늑한 방처럼 느껴진다. 물감의 밀도, 방의 구조와 가구 등으로 볼 때 뭔가 유럽의 한 가정집의 방처럼 보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침대 옆에 있는 역에 걸린 두 초상화는 이 그림이 서양의 어느 방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여하튼 사람들에게 위의 현실세계와 오른쪽의 가상세계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예술적으로 가치 있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후자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사유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그는 왼쪽의 허름한 방이 오른쪽의 아늑한 방보다 더 가치 있다고 볼 것이다. 현시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왜 허름한 고시원방이 아늑한 유럽의 방보다 우월한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전자는 이데아의 모방인 감각계 즉, 현실세계이고, 후자는 이데아의 모방인 현실세계의 모방이라는 점이다. 플라톤은 현실세계를 가상이자 이데아의 세계의 그림자라고 보는데, 따라서 그는 예술을 가상의 가상, 그림자의 그림자라고 말한다. 


  플라톤에게 감각계 혹은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라 불리는 이 세계가 본질인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하며, 그 진리에서 떨어져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플라톤은 모방의 모방인 예술은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계에서 두 단계나 떨어져 있다고 본다. 따라서 플라톤의 미학적 관점에서 볼 때,  현실의 침대는 아무리 허름하고 더럽더라도 그림자의 그림자인 아름다운 회화보다 더 우월하다.


아름다운 예술

  그렇다면 플라톤에게 아름다운 예술이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예술이 가상을 포기해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진리에 가까운 것이 예술작품으로써 더 가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에 가까운 예술이란 무엇인가? 미의 이데아가 현상계에 나타날 때 그것을 판단할 기준은 무엇인가? 플라톤에 따르면 그 기주은 '척도와 비례'이다. 어쩌면 플라톤의 미학의 관점은 파토스적인 감각과 무관하며, 동시에 수학적 직관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앞에서 나는 플라톤의 미학을 논할 때 피에타를 꼭 언급한다고 말했다. 이제 그 이유를 밝혀야겠다. 위의 조각은 현대인인 내가 보기에 훌륭한 작품이다. 하지만 굳이 크리틱을 날리자면 장년층인 아들이 중년인 어머니보다 체구가 작다는 것. 즉, 인체의 비례에 대한 문제가 있다고 보고, 또한 성모 마리아를 너무 젊게 재현했다는 점이 내가 보기에 비판할 만하다. 미켈란젤로의 저 작품은 정밀한 미학적 프로세스를 거쳐야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면 아름다운 작품이다. 어쩌면 실제로 저 작품을 대면한다면 그 크기와 직접 봤다는 감회로 더 큰 울림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그저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끝내면 될 상황에서 나는 굳이 한발 더 나가서 저 작품을 비판할까?


  플라톤의 미학적 관점에서 보면 저 작품은 비례가 알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뇌피셜인데, 내가 보기에 미켈란젤로는 저 작품을 감상할 때 아래에서 위로 바라보는 시선을 생각한 것 같다. 따라서 예수의 얼굴이 성모 마리아의 얼굴보다 아래에 있으며,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예수의 얼굴이 마리아의 얼굴보다 더 클 것이다. 물리적 거리로 인해서 이는 어쩔 수 없는 사항이다. 나는 오히려 마리아를 예수보다 크게 만듦으로써 관람객을 배려했다고 볼 수 있다고 본다. 예수보다 마리아를 더 크게 만든다면 아래에서 위로 시선처리하는 관람객에게는 적절한 비율로 그들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세계를 또다시 모방하는데, 그 비율을 무시하고 그저 관람객의 시선을 의식해서 가상을 만들어내는 저 작품이 과연 플라톤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작품일까. 아니, 선한 혹은 올바른 작품일까?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척도와 비율을 중시하는 플라톤에게 가상을 만들어내는 예술은 올바른 작품이 아니고, 검열해야 할 작품일 것이다. 


  플라톤에게 아름다운 혹은 선한 작품이란 가상세계인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그대로를 복사하는 즉, 거짓과 가상없이 있는 그 자체를 모방하는 것이 그에게 진정한 예술이자 필요한 예술일 것이다. 


예술의 역할과 검열

  『국가』는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에 대해 논하는 작품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여기서 예술의 역할도 다룬다. 내 기억으로는 3권과 10권에서 예술에 대해 논한다. 여기서 예술은 현대시대의 예술과 다른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예술을 정서나 감수성 따위와 관련짓지만, 그리스인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그들에게 예술은 테크네, 곧 합리적 규칙에 따른 활동이었다. 따라서 당시엔 회화나 조각뿐만 아니라 합리적 제작 규칙을 가진 활동, 즉 의자나 침대를 만드는 수공활동과 학문까지도 예술로 간주했다(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1, 102). 따라서 플라톤이 생각하는 예술의 범위가 현시대와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예술이란 생산적인 활동이다. 따라서 경제와도 연관이 되고, 국가의 통치와 한 인간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플라톤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국가에서 그에 방해되는 예술가들은 추방되어야 한다고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급진적인 발언을 한다. 플라톤이 보기에 예술이란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개인에게 촉진하는 것이자, 가상을 포기하고 진리에 도달하게 하는 활동인데, 특정 시인과 같은 자들이 그 숭고한 목적들을 방해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예술가란 국가에 도움이 되는 예술가와 가상과 허구를 생산하는 추방해야 할 예술가로 분리될 수 있겠다. 결국 플라톤에게 예술이란 선전수단이었던 것일까? 그에게 예술이란 철저하게 이상국가의 수단으로써 여겨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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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읽고 플라톤이 간접적으로 언급한 미학에 대해서 논해봤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플라톤이 예술가를 그 자체로써 보지 않고 양분함으로써 그들을 판단하고, 정치의 한 수단으로써 봤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다. 따라서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에 나오는 기울어진 해골과 같은 작품은 그에게 혐오의 대상일 것이고, 그 작품을 만든 예술가는 또한 추방의 대상일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철저하게 국익을 위하는 전체주의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 같다. 그래서 예술은 검열되고, 국가는 그것을 통해서 무언가를 전하길 바라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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