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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Aug 27. 2023

예술과 올바름

예술에 정석이 있는가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 알렉산드르 사하로프의 초상(Portrait of Alexander Sakharoff, 1909)

  난 위의 그림이 싫다. 뭔가 표정이 기분 나쁘다. 그리고 저 새빨간 옷과 푸르스름한 저 배경이 뭔가 불쾌하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도 알고, 이 그림을 구글링 했을 때 여러 콘텐츠가 나온다는 것은 이 그림이 유명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다. 대체 왜 저 그림은 유명할까? 나에겐 쾌나 감동을 주는 그림이 아니다. 나만 그런가?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은 저 그림을 보고 명작이라고 감탄하며 미학적 쾌와 같은 감동을 느낄까?


  미학적 쾌를 주는 정석이 있을까? 우리는 수많은 예술을 접하면서 일상을 살아간다. 조너선 아이브가 디자인한 아이폰을 사용하며, 누군가의 작품인 음악을 들으며, 그 음악 앨범의 재킷을 본다. 심지어 그 음악의 앨범재킷도 예술작품이라 볼 수 있다. 누군가는 그 음악이나 앨범재킷을 보고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 것이며, 다른 누군가에게 그 작품들은 그저 일상 속에 스쳐가는 의식 밖의 사물에 불과할 것이다. 혹은 그것들을 아주 혐오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예술이 인간에게 쾌를 주는 수단이라면 그 수단에는 정석이 있을까?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적 소신을 밝히는 파레시아일 때 빛이 날까 아니면 대중의 니즈에 맞춰서 작품활동을 할 때 빛이 날까? 예술이 내적인 활동인지 외적인 활동인지에 대한 판단은 예술의 정의를 먼저 내림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정의 또한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마치 예술활동을 하듯이 그 정의를 주관적으로 내릴 것이다. 헤겔은 예술이 대자적 존재로서 인간이 자신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라 했고, 자연미보다 예술미가 더 우월하다 판단했다. 하지만 칸트는 반대로 예술미는 자연미보다 열등하다 판단했다. 이처럼 철학자마다 각자 다른 예술에 대한 사유를 가진다. 아마 그들이 내리는 예술의 정의가 각각 다른 이유는 그들의 사유체계가 서로 다르며, 그들 각자의 주관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누구의 미학이 더 맞고, 우월한지를 가리는 것은 의미 없는 행위이며, 불가능한 선택이다. 


  예술은 주관의 산물이라 보는 게 내 관점이다. 뒤샹은 소변기에 사인을 함으로써 그것을 작품으로 만들고, 레디메이드(Ready-made)라는 개념을 창안해 예술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벽에 덕트테이프로 바나나를 붙이고 '코미디언'이라 그 작품을 명명했다. 누군가는 이 행위들을 예술이라 일컫는 반면 누군가는 그들이 사기꾼일 뿐이라며, 현대미술 자체를 부정한다. 


  그렇다면 예술과 비-예술을 나누는 기준은 무었으며, 그 기준은 누가 만드는가? 그건 아마 자기 자신일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작품이면 작품인 거고, 저 사람에게 작품이 아니라면 저 사람에겐 그저 공산품일 뿐일 거다. 그리고 반대로 내가 그저 공산품으로 치부하는 무언가가 누군가에겐 대단한 '미학적 쾌'나 감동을 주는 작품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을 이렇게 정의하고, 그 판단 기준을 이렇게 세우면 이건 그저 유아론적인 말장난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예술은 그저 애들 장난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술은 그 이상의 가치를 가졌다. 그래서 이 생각은 틀렸다.


  그렇다면 예술과 비예술을 나누는 보편적인 기준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 보편적인 기준이나 정의가 있다면 과연 그걸 예술이라 볼 수 있을까? 그런 정석적인 활동은 아마 예술보다는 공업적 기술이라 칭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공업적 현장에서는 업무에 정석이 있다. 그 정석은 아마 어떻게 해야 최소한의 투자 대비 최대한의 아웃풋을 뽑아내는 공리주의적인 방법론일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에 예술을 하는 방법이 정해져서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예술이 아니라 기술이며, 그저 경제활동에 불과한 것일까? 


  대체 예술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며, 어떻게 어떤 행위나 산물을 예술적인 것으로 분류해야 할까? 극단적으로 주관주의적 관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면 예술은 유아론적인 장난에 불과한 행위가 되어버리고, 그러면 예술에서 감동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리고 반대로 극단적으로 예술을 객관적인 기준을 통해서 정의한다면, 과연 그걸 우린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수학공식처럼 정해진 틀에 집어넣어서 당연한 값으로 산출되는 산물을 과연 우린 예술이라 판단하고, 그것에서 미학적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 이 경우는 아마 인간이라는 존재의 모든 것(사유나 심리적인 것 등)이 완벽하게 밝혀질 경우에나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과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나 인간을 완벽하게 정의 내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뭐가 예술을 예술로 만들고, 무엇이 쓰레기를 쓰레기로 만드는가. 그건 아마 담론일 것이다. 그리고 그 담론이란 아주 권력적인 것일 것이다. 뒤샹이 아니라 돈키호테가 변기에 서명을 하고 작품이라 우겼다면 역사에 예술작품으로 남지 않았을 것이며, 그저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뒤샹이라는 담론권력을 쥔 예술가가 변기를 예술이라고 칭하면 그건 예술이 된다. 왜냐하면 그에겐 그럴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그저 르네상스 에피스테메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전주의 시대인일뿐이며, 아무도 그의 담론에 신뢰를 가지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예술이라 생각하는 것들 마저도 역사적 선험성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인가? 예술과 올바름. 이건 인류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만약 해결한다면 과연 예술이 예술로서의 지위를 가질 수 있을까. 예술이란 우리를 사유하게 만들고, 쾌를 주는 것인데,  그 신비로운 것이 만약 정석에 의해 비신비로운 공업적인 행위가 된다면 과연 그것들을 예술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이데올로기에 의해, 담론에 의해 그리고 에피스테메에 의해 예술이 정의되기 때문에, 예술의 틀이란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유기체와 같다. 그리고 그 틀을 이해하는 순간 마치 미꾸라지처럼 예술은 우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새로운 수수께끼로써 우리에게 다시 등장한다. 그 수수께끼가 풀리거나 예술적 틀이 간파된다면 다시 우리에게서 벗어나서 신비로운 존재로서 다시 돌아온다. 이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어 현재까지 예술이 이어지는 것 아닐까? 예술이라는 신비롭고, 무의식적인 무언가를 발견하고 놓치고를 반복함으로써, 우리는 그에게서 흥미를 잃지 못한다. 어쩌면 지금은 우리가 눈길도 주지 않는 무언가 혹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무언가가 예술로서 등장해서 우리에게 보일 수 있다. 


  난 어릴 때 피카소의 우는 여인이 너무 불쾌한 작품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당시엔 그 그림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나에게 예술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예술에 관심을 가진 나에게 그 작품은 나에게 추한 물감 덩어리가 아닌 예술작품으로서 나에게 다가왔다. 예술이라 인식되지 않는 그 그림이 나에게 예술작품이 됨으로써 나에게 인지되었다. 예술은 안개와도 같아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닿을 듯 닿을 수 없으며, 그 현상은 그저 저 너머에 있는 환영일지도 모른다. 


  결국 예술의 가치는 논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카텔란의 바나나를 작품이라 대변하는 그의 변호사와 그에게서 예술이라는 지위를 타도하려는 검사의 승부를 통해서 그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올바르냐 그르냐. 이 뻔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우리를 생각하게 만들고, 그 애매한 올바름이 우리에게 예술을 향유하고, 비판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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