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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Feb 23. 2023

존재의 무게

Weight of being

렘브란트의 '자화상(1655)'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그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수많은 자화상을 남겼는데, 초기, 중기 그리고 말년 모두 다르게 자신을 표현했다고 나는 느낀다. 아무래도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파산했기 때문에 그의 후기 자화상에서 슬픔을 감출 수 없었을까?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도취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 존재의 무게도 엿볼 수 있는 작품인 것 같다. 그의 자화상을 보면 표정이 기분이 좋든, 좋지 않든 항상 진지해 보이기 때문이다. 초기의 작품이 낫다던지, 후기의 작품이 더 낫다든지 하는 논쟁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가벼운 렘브란트의 존재의 무게 때문에 사치스럽게 살던 초기가 우울해 보이는 후기의 무거운 존재의 무게보다 더 밝은 표정이기 때문에 더 좋은 작품이라고 우긴다면, 그 사람은 존재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 보긴 했을까 싶다. 물론 예술적 기호는 개인의 사적인 영역이고, 존중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작품에 대해 논하기 위해선 그 당시 작가의 삶과 의도를 모두 파악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왜 갑자기 존재의 무게에 대해 글을 쓰냐면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라는 네 명의 주요 인물이 나오는데, 토마시와 사비나는 가벼운 사랑을 추구하고, 테레자와 프란츠는 진지하고 무거운 사랑을 추구한다. 이 들의 이야기는 '가벼운 존재'라 할 수 있는 사람과 '무거운 존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의 사랑에 관한 것이다. 아마 가벼운 존재들끼리 만나고, 무거운 존재들끼리 만났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평범하고 뻔했겠지만, 가벼운 존재와 무거운 존재가 만났기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이들은 서로 사랑하지만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랑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질투하고, 이별한다. 결국 사비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사고로 죽게 된다. 


  이 책은 좀 어렵다. 우선 이 책은 7부로 나뉘어 있는데, 시간 순서가 정방향이 아니고 뒤죽박죽이다. 그래서 중간에 죽은 테레자와 토마시는 죽지만, 7부에서는 토마시와 테레자의 죽음 전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이 책을 보려면 아무래도 정신을 단단히 잡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 책에는 철학사상들이 여러 등장한다. 첫 장에서 밀란 쿤데라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중간에는 플라톤의 '이데아', 그리고 '향연'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의 가벼움, 무거움 그리고 부정적인 것, 긍정적인 것에 대한 이원론적 개념도 나온다. 그래서 철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었다면 이 책은 재미없게 느껴졌을 것 같다. 


  그래서 작가는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니체의 목소리를 빌려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세상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만족스러운 연인이 있음에도 운명이라 느껴지는 이성을 발견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쩌면 작가는 무거움과 가벼움 중에서 하나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걸 수도 있겠다. 가벼움은 가벼움대로의 장단점이 있고, 무거움은 무거움대로 장단점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거움과 가벼움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할까? 형이학적(물리학적)으로 인간은 물리법칙에 의해서 무게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다. 만약 가능하면 어제 100kg이었던 사람이 오늘은 50kg이 되고, 어제 155cm의 학생이 182cm의 어른이 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다이어트로 고생하는 사람도 없겠지. 하지만 인간은 물리학에 의해 통제받는? 아니 정의되는 존재라서 그러한 물리적 요소들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물론 노력을 하면 체중과 체형은 바꿀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 한계는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반대로 신체와 같은 물리적인 것을 제외한 마음과 태도 같은 형이상학적 것의 무게는 우리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우리의 태도와 마음가짐은 스스로 통제가 가능하다. 밖에선 진중한 학자인 사람도, 집에만 들어오면 손도 씻지 않고 게임기부터 켤 수 있고, 밖에서 술 마시고 캐주얼하게 놀던 사람도 집에 와서는 사색과 반성에 빠질 수 있다. 물론 사람이라는 동물이 상황에 종속되거나 지배되는 경향이 강하지만, 우리는 그 상황마저도 바꿀 수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난 말하고 싶다. 아니, 형이상학적 자유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나의 존재는 가벼워야 할까 아니면 무거워야 할까?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는 것 같다. 토마시와 같이 가볍게 살아도 어차피 한 번인 인생이고, 테레자나 프란츠와 같이 무거운 존재로서 사는 삶도 한번뿐인 인생이다. 그리고 무거움과 가벼움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비교대상도 없이 스스로 무거움과 가벼움을 논하는 것은 어쩌면 논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아, 이런 고민을 하는 것부터가 무거운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벼운 존재라면 과연 자신의 존재의 무게를 잴 생각을 할까?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매일 공부하고 운동하고 자기 관리에 철저하며 도덕적인 삶을 사는 사람과 그냥 쾌락만 추구하며 원초적이고 무질서한 삶을 사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옳을까. 나와 정반대인 사람과 나 자신을 놓고 비교하면 누가 더 잘 살고 있을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이 있고, 나는 나대로의 삶이 있는데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할까. 


  헤겔의 변증법처럼 결국 타자란 변장한 동일자가 아닐까 싶다. 나는 나와 반대인 사람을 보고 나를 타당하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나를 일깨워주는 반대요소로 여기거나 둘 중에 하나가 아닐까? 아 그렇다면 가벼운 존재에게 무거운 존재는 혹은 무거운 존재에게 가벼운 존재는 나를 성찰하게 되는 거울이 아닐까? 내가 보지 못한 나의 모습을 봄으로써 나를 변화시키는 변증법의 한 요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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