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cault's aesthetics
나는 미셸 푸코를 통해 철학에 입문했다. 내가 처음 읽은 철학 책도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다. 그 책을 읽는 데에는 아주 긴 시간과 큰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읽으면서 다소 고통스러웠다. 당시에는 철학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고, 독서마저도 에토스화 되지 않았던 시기이다. 다르게 말하면 감시와 처벌을 읽은 후로 나에게 독서가 습관화되었다. 나는 감시와 처벌을 읽음으로써 내가 구조 속에 갇힌 존재임을 깨닫고, 푸코의 철학에 빠졌다. 내가 하는 대부분의 행위들이 비록 내가 자의로 한 행위이지만, 푸코의 철학을 접하고 과연 이것이 내 자의인지 아니면 심리 권력이나 생체 권력에 의한 선택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푸코의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다른 책들도 읽었다. 그래서 광기가 왜 광기로 분류되는지, 사형이라는 형벌에서 수감형으로 변화하였는지 계보학적으로 추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주체가 아니고 객체인지 깨닫게 되었다. 광인이라는 분류 조차도 나의 자의가 아니라 담론에 의해 분류되는 것이며, 나는 담론에 종속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가 과연 이 사회에서 주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매일 했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푸코의 목적이 무엇일까? 왜 그는 사회의 모든 것을 해체하고서 나를 회의주의에 빠지게 했을까? 형벌의 변화에 따른 권력의 미시화와 광인이라는 타자가 왜 타자가 되었는지 그 역사를 앎이 과연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 나아가 이 책을 읽은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지 혹은 회의해야 하는지 혼란에 빠졌었다. 그 후 인간의 본능, 가족, 사랑과 같은 토대론적인 지식에도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내가 직립 보행하는 이유도 푸코의 주장처럼 권력에 의한 것은 아닌지,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위마저도 미시세계에서의 권력의 확인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즉, 당연한 것이 정말로 당연한 것인지 의심하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처럼 나라는 존재 말고 모든 것의 존재를 의심했다. 나라는 존재가 스스로 사회의 부품이 되어가는 것임이 아닌 회의감이 들었다. 결국 푸코의 사상을 접하면서 나는 나라는 존재가 사회에서 한없이 작은 점과 같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정말 나의 행복은 내가 행복이라 지각해서 행복이라고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남들이 정해놓은 행복의 기준에 내 인식틀을 맞추는지 고민해 보았다. 나는 푸코 철학을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내가 꼭두각시처럼 권력층이 정해놓은 대로만 사는 것이 아닌지 매일 생각하며 내 실존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하지만 푸코를 공부할수록 그는 나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해체하기만 할 뿐, 나에게 메시지를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푸코 공부를 멈출 수 없었다. 너무나도 자극적인 포스트 모더니즘 혹은 포스트 구조주의를 벗어나기엔 내가 그 철학에 너무 빠져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다른 철학들을 접하며 구조주의에만 너무 빠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딱 한권만 읽고 푸코 철학은 그만 파기로 결심했었다. 그래서 읽은 책이 다케다 히로나리의 '푸코의 미학'이다. 푸코와 미학을 함께 공부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하지만 기대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미학이라길래 미술에 대한 내용이 많을 줄 알고 그 책을 빌렸는데, 미술보다는 문학에 더 중점적인 책이었다. 하지만 그 책을 통해서 저자가 푸코는 우리 인생마저 예술작품이라고 말하고 싶어 함을 느끼고, 삶이라는 예술 작품에 대해 사색할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푸코&하버마스)'를 대출했다. 이 책은 푸코와 하버마스의 철학을 둘 다 서술한 책인데, 푸코에 대한 부분은 대부분 아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내가 얻을 부분이 정말 없을 것 같아서 그만 읽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다 읽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내가 원하는 답을 얻었다. 푸코가 무엇을 위해서 권력의 미시화를 주장했는지, 왜 타자의 역사를 추적했는지 그 답을 얻게 되었다. 감시와 처벌을 다 읽은 후 받은 충격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받았다. 푸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자기 배려'였다. 자기 배려는 결국 나 자신(Myself)을 배려하라는 아주 간단한 것이다. 푸코가 말하고픈 자기 배려는 결국 타인에 의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가 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아는 푸코를 단어로 나열하자면 권력, 지식(혹은 담론), 파레시아였다. 지식과 권력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 둘의 관계는 수용할 수 있었다. 근데 왜 푸코가 말년에 뜬금없이 파레시아에 대해 연구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권력에 무모하게 맞서는 말하기가 왜 뜬금없이 나왔는가? 하는 생각에 파레시아라는 개념은 나에게 푸코 철학의 일부로 느껴지기 보다 그냥 파레시아 자체로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자기 배려를 통해 파레시아 또한 지식과 권력에 연결될 수 있었다. 기울어진 권력관계에서 사실을 말하는 파레시아스테스는 자기 배려의 완성단계이자 마지막 관문이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찾은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결국 내 걱정과 수치심 또한 자기 배려의 부재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나'라서 '나'로써 살아가면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누군가에게 나는 나라서 나로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 깨달아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증언을 한다면, 나는 아마 미친놈 소리를 들을 것이다. 너무나 자명한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문장으로 큰 힘과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목요일에 과감하게 서양철학사 강의를 제끼고 본가로 갔다.
푸코로 인해 삶에 대해 회의를 하게 되고,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푸코에게 모든 이유를 들은 것 같다. 결국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금요일에 졸업시험이 끝나면 다시 푸코로 달려야겠다. 다음은 '성의 역사'에 도전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