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tological emergency exit
세상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른다. 누구는 지금 기쁘고 다른 누구는 슬프며, 나는 지금 이 글을 쓰지만, 당신은 이 글을 읽고 있다. 지금은 내가 작가이지만, 다음엔 당신이 작가고 내가 독자일 수도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이 기계론적인지 아니면 운명적인지 우리는 이성으로 알 수 없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언젠가는 위기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그 위기란 금전적일 수도 있고, 감정적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실존에 대한 불안에 의한 위기 일수도 있다.
건축물을 예로 들면 고층 아파트는 건축법상 필수로 재난 대피구역을 만들어야 한다. 위 사진 속의 아파트에는 다른 아파트와는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중간에 재난 대피구역이 있는 것이다. 자세한 법규는 모르지만, 일정 고도 혹은 층수 이상의 공동주택은 필수로 재난 대피구역이 있어야 한다. 사진 속의 현대하이페리온 아파트는 69층으로 고층아파트 중에서도 굉장히 고층인 편이다. 그래서 재난 대피구역이 두층이나 있다. 성수동 아크로 서울 포레스트처럼 49층 혹은 그 이하 층수인 건물들은 보통 재난 대피구역이 중간에 한 곳 있다. 재난 대피구역이 두 곳이나 되는 만큼 저 아파트가 높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저런 고급 아파트를 지을 때는 굉장히 철저히 시공을 하고, 설계도 굉장히 신중했을 거라는 추측은 누구나 할 것이다. 근데 왜 시공사는 저 아파트를 지을 때 재난 대피구역을 만들었을까? 본인들은 분명히 기술력에 자신이 있고, 재난구역이라는 것이 자칫 잘못하면 불안감을 줄 수도 있을 텐데?
우선 재난구역이 존재하는 이유는 고층건물에 대한 규제 때문이라는 법적인 측면이 있다. 국가는 국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위험을 미리 감수할 의무를 가지고 입법을 한다. 그래서 법적인 측면에서 저런 피난구역은 꼭 필요하다. 법규 말고 대피구역이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너무나 당연하게도 재난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한 시설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일본처럼 지진도 빈번하지 않고, 자연재해로 인해 큰 재난을 겪을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완전할 수도, 완벽할 수도 없다. 그래서 건축물의 부실시공으로든 입주자의 부주의로든 아니면 누군가의 고의로 인의적인 재난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 글의 맨 처음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만약을 위할 필요가 있다. 만약에 고층아파트에 불이 났는데, 재난 대피구역도 없고, 비상구도 없다면 말 그대로 재난을 대피할 재난 대피구역은 없을 것이다. 재난이라는 것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상황이지만, 우리는 혹시 모를 재난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저축을 하는 것이 아닐까? 당신의 직장이 아무리 지금 호황을 누리고 있어도 어느 날 갑자기 구조조정을 하거나, 당신을 해고할 수도 있다. 혹은, 건강상의 이유로 퇴직이나 휴직을 하게 될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이 당신에게 일어날 경우 당신은 건물주가 아닌 이상 소득이 없어서 생계를 꾸려나가기 힘들 것이다. 특히나 할부로 외제차를 샀다면 더더욱. 그런 상황에서 모아둔 돈도 없다면 당신은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친한 부자 친구가 있다면 그것도 나름의 비상구겠지만, 친구끼리 돈거래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 그 경우는 배제하자. 그렇다면 나 자신만의 능동적인 비상구가 필요할 텐데, 그 비상구는 저축으로 인해 만들어진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존재론적 비상구'의 가장 근접한 예로는 여행이나 취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씩 일탈을 꿈꾼다. 누군가는 여행을 통해서 지리적으로 벗어나고, 명품을 소비함으로써 본인의 신분을 능가하는 듯한 쾌감을 얻고, 누군가는 강의를 결석함으로써 일탈을 한다. 내가 추구하는 존재론적 비상구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추구하는 존재론적 비상구는 지속 가능하며, 일상생활에 악영향을 주면 안 된다. 또한 확실히 비상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만약에 강의를 안 가고 여행을 갔는데,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면, 과연 그 경우를 비상구로 들어갔다 할 수 있을까? 명품을 구매함으로써 존재론적 비상구에 들어간다면, 연속적인 시련 속에서 과연 경제적으로 감당이 가능할까?
그래서 나는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금전적으로 타격이 크지 않으며, 지속 가능한 취미 행위가 존재론적 비상구가 되는 것이 적합하다 생각한다. 물질적 쾌락 혹은 육체적 쾌락은 확실하고 강렬한 쾌락이라 초기에는 확실한 비상구가 되어 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익숙해지고, 더 큰 역치를 채워야 쾌락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정신적 쾌락은 지속성이 강하고, 물질적 지불이 적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 독서, 기타 연주, 카페 탐방, 산책, 음악 감상과 같은 존재론적 비상구를 가지고 있다. 말은 거창하게 존재론적 비상구이지만, 속된 말로 취미다. 하지만 이러한 존재론적 비상구는 나에게 취미 이상의 위안을 준다.
하지만 취미가 존재론적 비상구가 될 수는 있지만, 존재론적 비상구가 취미가 될 수는 없다. 너무 익숙해지면, 소중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강의를 맨날 나가지 않는 대학생과 강의에 매일 출석하고 열심히 참여하는 두 학생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전자는 평소에도 강의를 잘 가지 않기에 결석에 대해 큰 감회가 없다. 그에게 결석하는 것은 그저 일상이다. 기분이 좋아서 결석한 것과 기분이 좋지 않아 결석했다는 그의 결석 이유는 핑계에 불과하다. 그건 결석에 중독된 것이지, 존재론적 비상구가 아니다. 반면 후자에게 결석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다. 매일 출석을 하다가 갑자기 강의를 결석한다면, 그것은 일상이 아니라 일탈이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도 전자의 결석보다 후자의 결석이 더 체감이 클 것이다.
나는 스무 살 때 존재론적 비상구가 없었다. 당시 나는 실용음악과에서 기타를 전공했다. 매일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기타를 연주했다. 그래서 기타로 인해 많은 쾌락도 얻었지만, 많은 부정적인 감정들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강박에 취미도 가지지 않고 매일 연습만 했다. 그래서 기타로 스트레스를 받고, 기타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 결과 나는 감당을 할 수가 없었다. 비유를 하자면,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에게 직접 그의 욕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 당시 나에게 존재론적 비상구가 존재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과연 음악을 계속했을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당신만의 비상구를 만들어 놓으라는 얘기다. 나는 기타를 전공할 때, 비상구가 없는 고층건물과 같았다. 불이 나면 그야말로 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철학을 공부하면서 기타가 나의 존재론적 비상구가 되어준다. 어려운 책을 읽다가 나에 대한 실망 혹은 자괴감을 느낄 때 나는 책을 덮고 기타를 치거나 산책을 하면서 나만의 존재론적 비상구로 탈출한다. 과거와는 달리 지금의 나는 비상구가 여러 개인 나는 초고층건물 같다. 높이만 올라가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는데, 높이 올라간 만큼 하락의 충격도 크다. 마치 이카루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