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구조 속 객체의 소리 없는 비명
철학계에는 유명한 악마들이 있다. 진짜로 악해서 속된 의미로 말하는 악마라 칭하는 것은 아니다. 전지전능하지만 선이 결여된 존재이기 때문에 악마라고 칭한다. 데카르트의 악마와 라플라스의 악마를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접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으로 유명한 그 철학자가 맞다. 데카르트는 벽난로 앞에서 의자에 앉아서 세상의 모든 것을 회의하면서 그 끝이 어디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의심을 하는 주체인 본인 자신만은 의심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위와 같은 코기토 명제를 남겼다. 그는 어떤 강력한 능력을 가진 악마가 자신에게 개입하여 나의 모든 감각기관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을 경우를 상정하고 사고 실험을 진행했다. 그를 속인 가상의 악마가 바로 '데카르트의 악마'다.
라플라스는 공대생들이 아는 그 라플라스가 맞다. 그는 공학도들에게는 '라플라스 변환(Laplace transformation)'으로 , 철학도들에게는 '라플라스의 악마'로 그는 다소 친숙하다. “주어진 한순간 자연의 모든 존재의 위치와 운동 상태를 아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에게는 어떤 것도 불확실한 것은 없고, 미래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의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네이버 지식백과 출처)”라고 라플라스는 말했다. 라플라스는 한 에세이에서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이것은 뉴턴의 운동 법칙을 이용해 과거,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 주고, 미래까지 예언할 수 있다."라고 서술하였다. 후기의 전기 작가들이 이러한 능력을 지닌 존재에 악마(demon)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쉽게 말해 '현재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그것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완벽하게 유추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제목인 푸코의 악마는 어떤 존재일까? 이 악마는 내가 만든 가상의 악마다. 나는 미셸 푸코의 철학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내가 주체로써 사는 줄 알았는데, 사실 나는 권력의 산물이자 그저 객체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직립 보행하는 것마저도 권력의 산물이라고 의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내가 지금처럼 카페에서 죽치고 있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왜 옷을 입고 다니는가? 학교는 왜 다녀야 하지? 와 같이 일상에서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실 혹은 담론들을 의심하는 나와 같은 존재를 나는 '푸코의 악마'라고 칭한다. 타인들에게 아마 이러한 의심들을 얘기하면 나를 음모론자 혹은 피곤하게 사는 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의심을 씨앗으로 생각을 하고,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쓴다.
작년 11월에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횡단보도와 차도마저도 미시세계에서의 권력의 확인이 아닐까?" 옆에 친구가 있었더라면, 이 생각을 얘기했다면 나는 미친놈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횡단보도와 중앙선이 있는 까닭은 당연히 안전과 질서를 위한 것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감시와 처벌(1975)'를 읽은 지 얼마 되지 않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그 이후로 수많은 것들을 의심했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한국 정서인 '효(孝)' 마저도 의심했다. 그리고 지구가 둥근 것도 사실일까? 하는 바보 같은 의문도 던져보았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배운 지식들은 당연하고 생각하고, "지구는 둥글다"와 같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우리는 지구가 둥근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아마 수많은 방법으로 지구가 둥근 것을 증명할 것이다. 우주에서 사진을 찍으면 푸른 공으로 보이는 지구를 보고 이를 믿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정말 그것을 믿을 수 있는가? 사실 우주에서 찍힌 지구 사진은 합성이 아니고, 지구가 '구'형태임을 증명하는 다른 이론들도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당신은 증명할 수 있는가? 사실 지구는 무한히 긴 네모반듯한 접시인데, UN이 그 사실을 숨기고 지구가 구형이라고 속이는 것이라면?(나는 지구가 둥근 것을 믿는다.)
우리는 증명할 수 없이 그냥 받아들이는 이러한 사실들을 믿으며 산다. 그 이유는 우리의 능력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고, 내가 먹고사는데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푸코와 같은 천재가 될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의심을 통해서 위대한 생각 혹은 획기적인 발견을 할 수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의심은 음모론이 아니라, 탐구를 말하는 것이다. 진정 그 사실이 트루인가? 혹은 증명이 가능한가? 와 같은 사고로 우리는 위대한 발견을 할 수도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 사람들은 국내여행보다 해외여행을 선호한다. 나는 그 담론에 의문을 던져보았다. 대체 왜 해외여행이 더 좋은가? 이것은 물론 기호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나는 그 의심을 통해서 이 담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푸코의 악마가 됨으로써 막연한 동일자 혹은 담론의 객체에서 진정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은 주체가 되었다. 모두가 YES라고 대답한다고 내용도 모른 체 YES라고 대답할 필요는 없다. 잘 모르겠으면 음... 해도 된다. 오히려 그 음... 이 더 큰 가치를 창조해낼 수도 있다.
나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해외여행이 국내여행보다 가치 있는 여행인 줄 알았다. 그래서 해외에 갔다 온 친구들을 보면 이유 없이 동경해왔다. 하지만 결국 해외나 국내나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이고, 똑같이 물 마시고 밥 먹는 곳인데 왜 외국이라고 특별한가? 에 대한 생각을 해봤다. 그래서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즐기는 이유가 이질적인 이데올로기(대중적 표상 체계)를 느끼기 위해서라고 나만의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그 이질적 이데올로기를 느끼러 국내에서 내가 가보지 않은 곳 혹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 곳을 갔다. 그 결과 나는 만족스러웠다. 해외여행을 안 해봐서 그 쾌락과 비교할 순 없었지만, 나는 의심을 통해 새로운 여행의 방법을 터득했다. 또한 나는 커피는 스타벅스에서 마시는 것이 제일 좋은 줄 알았는데, 그것마저도 담론에 의한 자발적 동일 자화였다. 사실 나에게 커피는 다 그게 그거고, 스타벅스의 다른 점은 그 특유의 인어 문양과 초록색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의심했다. 인어와 초록색이 스타벅스에 갈 이유인가? 결론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다수가 스타벅스가 고급 커피라는 프레임을 씌웠기 때문에, 그 담론에 끌려다닌 것이었다.
이처럼 의심해보면 정말 터무니없이 당연하게 여겼던 사실들이 있다. 그리고 그 의심의 끝에는 깨달음 혹은 진실이 있다. 이런 사고 과정들을 보면 누군가는 해외여행 갈 돈이 없어서 정신 승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나는 그것마저도 의심하려고 한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 사실 내가 부럽지? 너는 이런 생각 못하지?라는 식으로.
권력이 담론을 만들고 담론이 권력을 만든다. 고로 권력과 담론은 맞물려있고 더욱 견고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 권력과 담론으로 맞물린 장벽을 어떻게 넘나 혹은 어떻게 부수나 고민을 한다. 그러다 결국 불가능하다 생각하고 권력에 무릎을 꿇는다. 하지만 내 앞에 장벽이 있다면 뒤돌아서 다른 길로 가면 되지 않을까? 오히려 다른 플랜 B에서 원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도 있다. 다수가 선호한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물론 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이유가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