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작품
우울, 불안, 열등감은 나를 힘들게 만드는 주된 요인이다. 그들은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나를 휩쓸고 간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우울하고 불안한 순간들이 자주 온다. 열등감의 경우는 내가 그 원인이 되기도 하고, 타자들의 언행이나 품행이 원인이 된다. 이러한 감정들은 나를 송두리째 흔들고, 모든 것들을 부순다. 그래서 가끔 이유 없이 그런 감정들이 느껴질 때면 너무 힘들었다. 내가 멘탈이 약한 건지, 내가 미친 건지 혹은 둘 다인지 끊임없이 나 자신을 원인 삼으며 자책했다. 요즘도 그런 감정들을 자주 느끼긴 한다. 하지만 철학을 공부하고부터는 그 감정들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려 한다. 오히려 푸코와 니체를 통해서 더 용기를 얻었다.
푸코와 니체는 내가 좋아하고, 영향을 많이 받은 철학자이다. 푸코는 동성애와 자살에 대한 강박을 가는 등 광기를 가진 인물이었다. 푸코는 정신병원에도 입원하고, 마약도 하고, 음지의 동성애 문화도 접하는 등 훌륭한 학자와는 다소 괴리감이 느껴지는 광기를 가진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는 본인의 재규어 자동차로 극한의 속도를 즐기는 스피드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니체 또한 광기로 유명한 철학자이다. 니체의 일생과 광기에 대한 것은 내가 잘 모르니 패스.
푸코는 아버지와의 갈등과 동성애자로써의 정체성으로 굉장히 힘들어했다. 그는 의사 집안인 부르주아 가문 출신인데, 그의 아버지는 푸코도 집안의 전통에 따라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푸코는 수학에 재능이 없었고, 철학자가 되고 싶었다. 이유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는 아버지를 극도로 싫어하기도 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 "폴 미셸 푸코"에서 폴을 떼고, 미셸 푸코로 활동했다. 푸코 집안에서 아들의 이름은 무조건 폴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이름이 폴 푸코다. 그래서 미셸 푸코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고자 그와 같은 이름인 '폴'을 버렸다고 한다.
내가 니체와 푸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의 철학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 심지어 도덕과 정상의 경계마저 부수기 때문이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를 통해서 광인과 정상인을 가르는 기준인 이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었고, '감시와 처벌'을 통해서 대중이 어떻게 권력층의 지배를 그들도 모르게 받고 있는지 폭로한다. 후반에는 고대 그리스의 '파레시아(parresia)'에 대한 연구를 하며 자기 배려를 완성하고자 했으나, 에이즈로 인해 사망했다. 니체는 이러한 푸코에게 영감을 준 인물이다. 흔히 니체를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비유하는데, 그는 기존의 모든 철학을 부수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도덕의 계보학'을 통해 선과 악에 대해 알아보는데, 이러한 계보학적 연구가 푸코에게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들은 어떻게 몇 세기 동안 견고하게 보호되던 권력에 칼을 들이밀 수 있었을까? 아니 어떻게 당연한 것들을 의심하게 되었을까? 나는 그 이유를 그들의 광기라고 생각한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보면 시대마다 다른 에피스테메로 인해 광인의 정의가 유동적으로 변했다. 또한 광인의 범위란 다수의 정상과 다른 약자의 조건이라면 쉽게 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푸코는 동성애라는 광기를, 니체는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광인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당연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광기를 해체할 수 있었고, 신을 죽일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푸코는 의사의 아들임에도 정신의학에 도전을 하게 됐고, 니체는 목사 집안의 아들인데 신의 죽음을 선언했다.
생각나는 대로 막 쓰다 보니 오늘의 글은 굉장히 두서가 없는 것 같다. 우울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니체와 푸코의 인생을 얘기하다가 그들의 업적까지 얘기했는데, 굉장히 매끄럽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위의 내용은 어떻든지 상관없다. 오늘 나는 니체의 작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 읽었다. 니체란 인물의 글이 워낙 난해했지만, 정말 강력하고 날카롭게 니체의 사유를 내 가슴에 꽂았다. 그보다 망설임 없이 글을 쓰는 철학자가 있을까? 그보다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철학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니체는 인간의 영혼을 낙타, 사자, 아이에 비유하였는데, 낙타의 영혼은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지는 객체를, 사자는 그 모든 명령을 뿌리치고 자신의 길을 찾아 헤매는 진취적인 인간을, 아이는 모든 사자의 영혼에서 불안과 고통을 모두 버리고 새로 태어나는 존재이다. 니체는 낙타의 영혼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 아이의 영혼 혹은 위버멘쉬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낙타는 뒤에 주인이 없어도 주인을 의식하며 무거운 짐을 나르지만,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짐 가방에 들어있는 것들은 쓸 때 없는 돌멩이일 뿐이었다. 이러한 멍청한 낙타와 같은 인간을 니체는 경멸하며, 스스로를 극복해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의 광기에 불안을 느끼는 나는 진정 사자의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사자가 되기에 부족하다. 하지만 사자가 될 수는 있다. 나는 지금 뒤돌아 주인의 부재를 확인하고 짐을 버리는 낙타와 같다. 해야 할 일을 무시하는 과정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낙타와 같이 나는 남들과 다른 감정을 겪는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광인으로 몰아붙인다. 광기란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것이 아닌데 말이다. 남들보다 과한 불안과 깊은 고민들이 나의 글을 쓰게 되는 원동력이 되어주고,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게 해 준다. 사실 이 다른 깊이의 감정도 우린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의 사적언어논증과 같이 우리는 감각질이 서로 다르고, 기호도 다르기 때문에 굉장히 상대적이고 다원적인 관점을 가진다. 고로 어쩌면 나보다 더 불안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나의 불안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왜냐면 너는 너고, 나는 나이기 때문에 서로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로 이상하다, 미쳤다와 같은 광기는 겉으로 드러나는 언어의 형태일 뿐 다 허상일 수도 있다. 아 뭔 말을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냥 나는 내 불안과 우울을 이용해서 내 글을 쓸 뿐이고, 이 감정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에게 영감을 주는 내 예민한 감정에 축배를 들어줘야겠다. 미쳤다면 미친 거고, 아니라면 아닌 거다. 하지만 그 기준은 무조건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