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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Oct 04. 2022

소크라테스(Socrates)

무지를 아는 것이 곧 앎의 시작이다.

소크라테스(Socrates, B.C ? ~ 399)

  소크라테스는 참 유명한 철학자이다. 철학을 한다면 어느 분야에서든 소크라테스를 접할 수밖에 없으며,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철학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크라테스는 예수, 부처, 공자와 더불어 세계 4대 성인 중에 하나로 꼽히며, 그 또한 직접 쓴 책이 없고, 그에 대한 말들은 그의 제자들이 남긴 글에 의해서 현대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는 그 유명한 플라톤이고, 플라톤의 제자도 그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소크라테스는 술을 잘 마셔서 절대 취하지 않는 주당이라는 사실과 굉장히 못생겼다는 사실(러셀의 서양철학사에서 말하기를)은 굉장히 의외였다. 물론 철학자라고 술 잘 마시면 안 되는 법은 없지만, 현자라는 프레임 때문인지 난 소크라테스가 주당이라는 사실이 의외였다. 소크라테스의 인생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글이 굉장히 길어지니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그의 철학에 대해 얘기해보자.


  델피의 신탁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는지 묻자,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라는 대답이 나왔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굉장히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만 알고 나머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답은 신이 한 대답인데, 신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놀랐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신탁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현명한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한 정치가를 제일 먼저 만났다. 그 정치가는 다른 사람들이 다 자신을 현명하다고 했으며, 스스로 그 말을 더욱 그렇게 믿는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채고, 친절하게 그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 결과 그 정치인은 소크라테스를 미워하게 되었다. 그 후 소크라테스는 시인을 찾아갔다. 그들에게 자신의 시를 설명해달라고 하자 그들은 설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결국 또 그가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다음에는 기공을 찾아갔는데, 그들에 대해서도 실망했다. 결국 그는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을 찾으려다가 찾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적들을 만들게 되었다. 


  "신만이 현명하며 신탁으로 인간의 지혜는 무가치하거나 혹은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따라서 신은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름을 사용하여 이렇게 말하려는 것이다. '오, 인간이여, 소크라테스처럼 자기의 지혜가 실제로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다.'(러셀 - 서양철학사 139p)" 신은 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없다고 했을까? 그 이유는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 현자였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것만을 알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또한 알고 있었다. 이것을 '무지의 지'라는 단어로 설명하고는 한다. 흔히 아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이 "너 자신을 알라."인데 그가 자신을 알라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알라는 말이다. 그 후 소크라테스는 지혜 있는 체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지혜를 보여주는데 그의 모든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그는 초라한 낡은 옷을 몸에 걸치고, 어디에서나 맨날로 돌아다녔다. 또한 그는 더위, 추위, 목마름, 굶주림 등에 대해 무관심해서 주위 사람들이 놀라곤 했다. 소크라테스는 겉모습과 지각과 같은 감각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일까? 마치 파르메니데스가 감각은 기만적이며 감각적인 것들은 단지 환영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한 것일까? 그가 하늘에 속하는 영혼과 땅에 속하는 육신의 이원론과 더불어 영혼으로 육신을 완전히 극복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는 육체보다 영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 


  플라톤의 작품에서 소크라테스는 계속해서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줄을 안다는 점에서 남들보다 자신이 현명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그가 지식을 얻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진 않았다. 그는 언제나 질문을 던져, 인간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끌어낸다고 주장한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마치 '산파'와 같다. 산파는 아이를 낳을 때에, 아이를 받고 산모를 도와주는 일을 직업을 말하는데, 산파는 아이를 낳는 것을 돕고, 산모가 아이를 잘 낳도록 유도하지만, 아이를 대신 낳아줄 수는 없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산모'의 역할인 질문을 받은 자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한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미워했고, 그의 적은 계속 증가했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배운다는 것은 전생에서 알게 된 것을 지금에 와서 상기하는데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습득하는 지식은 전생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데, 상기를 통해서 그 지식을 다시 기억해낸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상기설을 현대사회에서 적용해보면, 코로나라는 질병을 점점 알아가는 우리는 전생에 코로나를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이러한 미지의 바이러스를 정복하지 못한 인류를 보면 상기설이 현대 사회에서는 그저 유명론적 명제에 불과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진정한 현자였던 소크라테스는 말년에 재판을 받게 된다. 죄목은 소크라테스가 국가에서 경배하는 신들을 경배하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들을 도입하고, 또한 이에 따라 젊은이들을 가르쳐서 타락시킨다는 이유였다. 결국 그는 사형을 받게 되고 그의 영혼은 육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야말로 진정한 계몽주의자가 아니었나 싶다. 그는 철학적 산파술을 통해서 사람들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게 해 준 고대의 계몽주의자가 아니었을까. 


  파레시아(parrhesia)란 기울어진 권력관계에서 진실을 말하는 행위를 말한다. 예를 들어, 왕과 신하, 스승과 제자, 부모와 자식과 같은 관계에서 용기를 가지고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행위이다. 소크라테스야말로 고대 그리스의 파레시아였다. 그는 그의 문답법을 통해 기울어진 권력관계에서도 굴하지 않고 상대를 계몽시켰다. 그래서 권력층은 대중을 계몽시키는 파레시아인 소크라테스가 거슬려서 사형을 시킨 것은 아닐까? 현대 사회에서도 계몽이란 뜬 구름 잡기처럼 여겨지고, 학교라는 교육기관에서도 마치 붕어빵 만들듯이 프롤레타리아만을 생산해내기 바쁘다. 그래서 사람들이 문사철은 배고프다는 담론을 만들어서 시민들의 계몽을 막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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