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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Dec 21. 2022

아바타에서 칸트철학이 보였다.

Was ist der mensch?

아바타 2(2022)의 한 장면

  어제 논문을 하나 끝냈다. 배운 것에 대해 소논문형식으로 리포트를 제출하는 것이 기말고사 대체 과제였는데, 뭔가 종강하고 방학숙제하는 느낌이었다. 강의 주차별 물음이 있었는데, 그 물음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과제였다. 그래서 나는 "칸트,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라는 물음을 고르고, 그에 대해 글을 썼다. 칸트라는 이름만 들어도 어렵다는 생각부터 들지만, 최근에 칸트에 특히, 3대 비판서에 관심이 생겨서 이 물음을 고르고 이에 대해 글을 썼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칸트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다. 3대 비판서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Was kann ich wissen?)",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Was soll ich tun?)" 그리고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Was darf ich hoffen?)"에 대한 칸트의 대답이다. 철학은 크게 진, 선, 미 세 분야로 나뉘는데, 앞의 세 가지 질문들이 각각 우리가 진, 선, 미에 대해 고찰하게 한다. 


  어제 칸트에 대한 논문을 마치고 저녁에 최근에 개봉한 영화인 '아바타 2 : 물의 길'을 관람했다. 솔직히 크게 기대 안 했다. 그냥 재밌는 영화겠구나 했다. 3D로 예매했는데, 솔직히 3시간 반을 다 안경 쓰고 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했다. 과거에 3D영화를 보면 항상 중간에 어지러워서 안경을 벗었던 것 같다. 근데 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지 않았다. 3시간 반동안 미친 cg에 취해서 안경을 벗을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 미친 cg와 특별할 건 없지만 재미있는 내러티브를 통해서 나는 최근에 칸트에 대해서 공부한 탓인지 칸트 철학이 보였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공감하지 못해도 이해한다. 그저 내가 잠시 칸트철학을 이해했다고 착각 혹은 도취해서 이런 생각을 했을 수 있으니. 하지만 글로 남겨보면 재밌을 것 같아서 그냥 써보려고 한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Was kann ich wissen?)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순수이성비판』(1781)을 통해 칸트에게 들을 수 있다. 칸트는 이 저서를 통해서 인간이 어디까지 알 수 있는지를 한계 짓고, 경험기억을 배제한 트란스젠덴탈(transzendental)한 인식론을 정립했다. 결국 이 물음은 인간의 지식에 대한 고찰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칸트의 이런 인식론적 물음과 그에 대한 답변을 어떻게 영화를 보면서 떠올렸을까? 나는 아마 이 영화가 현재보다 고도로 발달된 미래를 배경으로 스토리를 전개하게 때문에 인간의 지식과 그에 대한 한계에 대한 궁금증으로 인해 칸트의 인식론적 질문을 떠올린 것 같다. 2009년에 본 아바타도 굉장했다. 그때도 난 그 영화를 보고서 굉장한 하이테크놀로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22년에 본 아바타 2도 마찬가지였다. 13년 사이에 고도의 첨단 기술이 익숙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난 이 영화에서 또다시 그래픽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아바타 3가 2024년에 나온다는데 그때는 얼마나 더 진보된 기술로 나를 놀라게 할까? 이 영화 시리즈를 보면서 인간의 기술적 진보에 대해 체감하고, 생각하고,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2009년에도 대단하고, 2022년에도 대단하게 느껴진 이 영화는 다음시리즈에선 어떤 대단함을 보여줄까? 다음 미래에 인간은 과연 얼마나 더 알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컴퓨터 그래픽을 이해하고 지식을 확장시켜서 관객에게 경이로움을 느끼게 할까?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Was soll ich tun?)

  트롤리 딜레마는 윤리학을 공부했다면 들어봤을 것이다. 하나의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다수를 희생할지, 아니면 다수를 위해 하나를 희생할지에 대한 문제다. 항상 전쟁이나 액션씬이 있는 영화에서는 누군가가 인질로 잡히거나, 다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생긴다. 아바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수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향한다. 과연 현실에서도 사람들은 그럴 수 있을까? 공리주의적으로 보면 한 명을 포기함으로써 다수가 이익을 보거나 손실을 입지 않는다면 그 한 명을 포기하고 다수가 편해지는 것이 더 올바른 행위이다. 현재 사회에서는 자본이라는 효용(utility)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손실보다 이익이 크다면 그 행위는 이윤이 남기 때문에 옳은 행위가 된다. 그렇다면 영화에서는 어떨까? 악당에게 쫓기는 주인공을 조연들은 그에게 넘기지 않고, 오히려 돕는다. 일부 영화에서는 주인공을 배신하긴 하지만, 다수의 등장인물들은 주인공을 위해 무엇이든 한다. 나는 여기서 솔직히 인간적인 감정이라기보다는 너무 작위적인 요소라는 생각이 든다. 현대사회인들이 과연 저 정도로 낭만이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면 왜 영화는 공리주의가 아니라 칸트의 선의지를 우리에게 보여줄까? 사실 영화에서는 각 인물들의 경향성이 반영된 행위이기 때문에 칸트 철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하지만 결과보다 동기를 중시하기 때문에 연관이 아예 없다고 할 수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영화는 우리에게 선의지를 보여줄까? 나는 그 이유를 각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영화로 라도 결과주의가 아닌 형식주의 윤리학을 익혀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은 갈수록 경시되고, 사람들은 진지함과 오글거림을 멀리하는데, 영화로라도 우리의 숨은 선의지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쓰고 보니 뭔 개소리인지 나도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Was darf ich hoffen?)

  칸트는 이 질문에 대해 『판단력비판』(1790)을 통해 대답을 시도하였다. 이 책은 주로 미학적 쾌에 대해 다룬다. 우리가 어디서 쾌를 느끼고, 무엇이 아름다운지 칸트는 이 책을 통해 정의한다. 이 책을 안 봐서 난 자세히는 모른다. 원저는 보지 않았고, 해설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봤다. 판단력비판에 따르면 우리는 숭고를 느낄 때 쾌를 느낀다. 그 쾌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이다. 전자는 인간의 이성으로 계산할 수 없는 혹은 측정할 수 없는 바다, 산, 절경과 같은 대자연을 볼 때 느끼는 불쾌와 쾌를 동반한 감정이고, 후자는 번지점프, 천둥번개, 폭풍, 태풍과 같이 인간이 두려워할 만한 것에서 느끼는 불쾌와 쾌를 동반한 감정이다. 숭고란 어떻게 보면 쾌도 아니고 불쾌도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쾌를 느끼는 동시에 불쾌를 느낀다.

  아바타 2라는 영화는 이 두 가지 숭고를 다 내게 느끼게 해 주었다. 미친 그래픽으로 나에게 가짜 자연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자연미에 충실했다. 마치 내가 진짜로 판도라행성에 있는 것 같았다. 삼 형제 바위가 내 앞에 있는 것만 같았고, 정말로 수학적 숭고를 느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3D로 영화를 관람해서 그런 걸 수도 있는데, 비행하는 장면을 보여줄 때는 진짜로 내가 나는 것만 같고, 등장인물이 떨어지는 씬이 나올 때면, 진짜로 내가 떨어지는 것과 같은 역학적 숭고도 느꼈다. 아무튼 이 영화는 가상의 장면이지만 나에게 숭고를 느끼게 해 주었다.


마무리?

  솔직히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원래 어제 영화를 관람하고 바로 집에 와서 쓰려고 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그냥 자서 어느 정도 망각된 부분이 있다. 영화를 철학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너무 억지로 연결시킨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냐? 우리는 우리를 성찰해야 한다. 그 매개체가 영화, 책, 음악 혹은 예술작품이던 상관없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인간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길 바란다. 그 사색엔 분명히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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