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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Dec 29. 2022

'한국인'의 이데아

성실하고 착한 사람

한스 홀바인 대사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올바른 사람이란 무엇인가? 아니 올바름 자체란 무엇인가? 오늘은 철학책을 보지 않고, 움베르토 에코의『장미의 이름』(1980)을 보았다. 다 읽지는 못했고, 상편의 60페이지 정도 남겨두고 오늘의 독서를 마쳤다. 분명히 독서를 4시간 한 거면 많이 한 건데, 뭔가 더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철학자가 되고 싶은데, 움베르토 에코, 미셸 푸코, 하이데거와 같은 거장들이 지금 나의 상황에 쳐했다면 뭔가 밤에 잠들기 전까지 공부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그들처럼 되고 싶은 나는 깨어있는 동안에 최대한 많이 공부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 독서를 다하고 산책을 하면서 생각을 해봤다. 도대체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철학자가 되려면 하루종일 두꺼운 철학 고전서들만 읽는 것이 옳은 것인가? 에코의 소설 같은 작품을 보는 것은 일탈인가?


플라톤의 이데아론

  플라톤은 세계를 두 개로 나누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와 우리가 감각하지 못하고, 이성으로만 알 수 있는 예지계로. 현상계는 흔히 말하는 현실 세계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고, 예지계는 종교적으로 보면 천국, 천당 혹은 극락과 같은 사후 세계라고 할 수 있는데, 플라톤은 예지계를 이데아의 세계라고 정의했다. 이데아의 세계는 참되고 완벽한 세상이다. 이데아의 세계만이 참이고,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른 세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는 이데아를 흉내만 낸 가짜에 불과하며, 육체라는 영혼의 감옥을 벗어나야만 우리는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플라톤은 『국가』에서 말한다. 


  플라톤은 왜 이데아 이론을 내세우며 참된 것과 그른 것을 그의 책『국가』에서 다룰까. 이 이유는 그가 추구하는 이상국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다. 플라톤은 국가의 계급을 세 단계로 나누었는데, 맨 위에 있는 지도자는 철학을 익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철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상계의 가짜에 의존하지 않고 예지계의 진짜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철학을 하는 사람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이데아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대와 같은 사물에는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플라톤에 따른 우리가 밤에 자는 침대는 가짜라고 한다. 그것은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침대의 이데아를 모방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현실세계의 침대가 가짜라고 한다.(그래서 플라톤은 이데아의 모방인 현실 세계를 재모방하는 예술을 비판하고, 그가 생각하는 이상 국가에서 예술가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플라톤에게 옳은 침대란 오직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침대의 이데아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 세계의 모든 침대들은 다 똑같이 그른 것일까? 플라톤은 세계를 이원론의 관점으로 보아서 이데아가 아닌 것들을 그르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이 그른 것들도 서열을 정할 수 있다. 그것은 이데아를 얼마나 닮았냐를 가리고 정하는데, 이를 에이도스(eidos)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더 많은 비율의 에이도스를 가진 침대가 현상계에서 그나마 더 옳은 침대이다.  


인간의 이데아

  그렇다면 인간의 이데아는 어디에 있을까?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대철학을 전공하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플라톤은 인간의 이데아를 정해놓은 것 같다. 플라톤은 스파르타에 의해 스승 소크라테스를 잃었다고 생각해서 자국인 그리스를 더 강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로 『국가』를 통해 이상 국가를 설명하려고 한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틀릴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부국강병을 위해서 계급을 나누고, 그에 맞는 계급 특성을 정한다. 또한 그가 생각하는 이상국가는 현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체주의 국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개인의 자유에 대해 엄격하다. 플라톤이 인간의 이데아를 만들어 놓지는 않았으나, 계급제는 존재하고, 계급은 물려받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인간의 이데아를 만들어 놓은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프롤레타리아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은 프롤레타리아로 실존이 정의되고, 그에 맞게 노동을 자신의 텔로스(telos)를 상정하고, 그의 자식 또한 반복될 것인데, 그렇다면 그 가문의 이데아는 노동자의 이데아와 동일하지 않을까 싶다. 


  플라톤과 교수님은 인간의 이데아가 없다고 주장하시지만, 우리는 암묵적으로 인간의 이데아를 만들고, 그에 맞게 되려고 노력한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그것이 심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인의 이데아

  올바른 학생이란 무엇일까? 좋은 성적을 받고, 교우 관계가 좋으며,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올바른 학생일까? 우리 사회는 착함과 좋음이라는 형용사를 사물, 직업 혹은 인간에 붙임으로써 그의 이데아를 만든다. 물론 모든 사람이 보편적인 기준과 기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보편적인 이데아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대사회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좋음과 선함의 정의로 인해 하나의 이데아가 정해져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하나의 개인 혹은 사람이 아닐까.


  언제부턴가 초등학생의 장래희망이 유튜버, 웹툰작가, 공무원, 건물주가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과학자, 운동선수, 대통령, 선생님 같은 직업들이 장래희망으로 유행했는데, 요즘은 시대가 변해서 그런지 달라졌다. 그렇다면 왜 그런 변화가 생겼으며, 무엇이 그러한 변화를 야기했을까? 나는 그 이유를 부와 돈에 대한 담론의 확산이라고 생각한다. 미셸 푸코가 『담론의 질서』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담론은 개인에게 욕구를 형성하게 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미디어에서 송출하는 자본에 대한 담론이 인간의 무의식이 돈이 최고이며,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인간의 이데아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든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현재의 한국인은 돈 많은 건물주, 유튜버와 같은 인간을 인간의 이데아로 자리 잡고,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글을 쓰다 보니 플라톤이 왜 인간의 이데아를 주장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 만약 인간의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을 한낮 사물과 같은 대상으로만 보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 사회에서 사람은 하나의 대상일 뿐이다. 취업만 봐도 그렇다. 현재 취업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 비슷비슷하다. 토익은 몇 점 이상이고, 자격증은 몇 개고, 어학연수도 갔다 오는 등 다 비슷한 스펙을 가지고 취업을 준비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기업이 원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서 이다. 들어가고 싶은 기업이 있으면 그곳에 맞는 인재가 되어 최종합격하는 것이 물론 옳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개개인의 인생의 실존의 자유를 무시한 채 하나의 최적의 루트만을 따라서 타인들이 말하는 이데아의 인간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인간의 이데아를 부수기로 결정했다. 아니 어쩌면 세상에 기투하는 내가 주체로서 나의 이데아를 직접 만들려고 하는 걸까? 남들의 옳음과 그름의 기준을 무시하면서 살 수는 없다. 그러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그렇게 되면 나도 똑같이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한으로 나만의 옳고 그름의 기준을 만들고, 나의 형상을 향해 세상에 나를 기투하려고 한다. 대체 내가 왜 남이 정해놓은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할까 하는 의문에 두서없이 글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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