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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Dec 03. 2021

탄생과 소멸 사이

우리는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인간이 잉태되고 세상에 나올 때,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세상에 
던져졌다. - 마르틴 하이데거 -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우리 인간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 혹은 버려진 존재라 말했다. 그는 이 개념을 피투성(Thrownness)라는 단어로 정리했다. 우리가 세상에 던져졌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가? 우리가 던져진 이유는 또 무엇인가? 우리는 태어난 직후부터 언젠가 맞이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시한부가 아닐까. 만약 당신이 시한부라면 지금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인간은 언제까지나 존속할 그 무엇이 아니라
해변가에 그려진 얼굴이 파도에 이내 씻겨 버리듯
그렇게 금세 지워져버리고 말 것이다. - 미셸 푸코 -


  하이데거와 달리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인간의 끝에 대한 말을 남겼다. 위의 인용구는 그의 저서 '말과 사물(1966)'의 마지막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세상에 던져졌다고 하고, 푸코는 인간이 영원 한것이 아니라 유한하고 순간적이라고 말한다. 누구는 우리가 던져졌다고 하고, 다른 누구는 우리가 순간적이라고 주장하니 나는 삶을 왜 열심히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세상에 던져진 한 인간을 버려진 쓰레기에 빗대어 보자. 버려진 쓰레기는 쓸모가 없다. 더 이상 쓸모가 없으니 버려진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쓰레기의 용도는 없고, 이것에 대한 기대도 없을 것이다. 쓰레기는 그냥 공간만 차지하는 물체로써 자기의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던져진 인간도 그저 공간만 차지하고 살면 될까? 던져진 우리에게 혹은 버려진 우리에게 기대를 걸 이유가 있을까? 어차피 수동적으로 버려진 인생 대충 살아도 되지 않을까?


  이번엔 푸코의 주장을 중점으로 두고 삶에 대해 생각해보자. 푸코는 인간이 금방 지워져 버릴거라고 말했다. 이 말이 굉장히 회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만약 내일 지구가 멸망해서 당신이 사라진다면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을 마져 읽을 것인가? 아니면 원초적으로 욕구를 표출하며 살 것인가? 푸코 또한 인생을 회의적으로 표현 한 것이 맞는 것 같다. 이 두명의 천재 철학자들이 인생을 회의적으로 말하는데, 왜 본인들은 그렇게 열심히 살고 많은 것을 남겼을까?그들도 한순간 사라질 인간일 뿐인데 왜 많은 책과 지식을 후대에 남겼을까. 나는 그 답을 니체에게서 찾은 것 같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영원회귀 그리고 Amor fati

  니체는 우리의 인생이 원의 형상을 띠면서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고, 환생하여도 다음 생에서 새로운 삶이 되는 것을 부정하고 계속 동일한 삶이 되풀이 된다는 ‘영원회귀’사상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삶을 부정하지 말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운명관을 주장했다.


  니체는 우리의 인생은 계속 반복되는 것이니 그 운명을 부정하지 말고 받아들여야하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해야한다고 말한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위해 추울 때 기꺼이 외투를 벗어주고, 원하는 것을 주고, 그가 잘 되도록 도움을 주고 싶어한다. 니체는 ‘그 사람’이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을 아모르 파티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던져진 존재고, 언젠가 우리도 모르게 사라질 존재이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싶다.


  앞의 세 철학자들은 세상을 위해 공부하고 연구를 했을까?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1차 욕구가 자신을 사랑하는 욕구이기에 자신이 사는 세상이 더 나아지길 원하는 2차 욕구를 만든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1차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2차로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려 노력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해서 남 주냐?”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말이 한국식 아모르 파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비관적인 관점으로 인생을 바라보면 사랑하는 자신을 위해 억눌린 운명 속에서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 자기계발과 성취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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