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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Mar 03. 2023

성의 역사 3 : 자기 배려

L'Histoire de la sexualité 3

미셸 푸코(1926~1984) - "성의 역사 3 : 자기 배려(1984)"

  역자가 서문에서 밝히길 "Le souci de soi"라는 원어 제목을 한국어로 바꾸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개정판 전에는 '자기 배려'가 아닌 '자기의 배려'였다고 한다. '성의 역사'라는 타이틀과 '자기 배려'라는 서브타이틀. 이 둘 사이의 관계란 예측하기 어렵다. 성(sexuality)이라는 개념과 번역되었지만 낯선 말인 '자기 배려'의 연관성이란 참으로 무슨 내용인지 예측하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읽고 나니 왜 자기 배려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 책을 완전히 이해했다거나 읽기 쉬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책은 학술서인 만큼 정말 어렵고, 자료의 양도 방대하다. 푸코는 이 책에서 아르테미도로스라는 꿈을 해몽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대체 해몽술이 성의 역사와 무슨 상관인가? 기술과 의학이 발달한 2023년에 내가 이런 부분까지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푸코가 아르테미도로스 말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나 '꿈의 해석(1899)'을 인용했더라면 과연 그 정도로 지루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푸코의 책에서 현대적 의의를 찾는 것은 어렵다. 방대한 과거의 문헌들을 참고로 상당히 문학적인 작문으로 인하여 내가 철학책을 읽는 것인지, 문학작품을 읽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종종 있다. 특히나, 성의 역사 시리즈는 더더욱 현대인에게 주는 메시지를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고대 그리스 철학사와 성 풍속에 대한 역사를 섞은 것 같은 이 시리즈는 마치 크레타섬의 미궁과 같다. 푸코가 말하고자 하는 주장 한 문장을 찾기 위해서 책 전체를 헤매야하며, 방대한 고대 사료들로 인해서 의지를 꺾이고 책을 덮기가 쉽다. 나는 읽으면서 "내가 이런 부분까지 정말 읽어야 할까..." 하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는지 셀 수도 없었다. 하지만 참고 견디며 차근차근 때론 속도감을 붙여서 휙휙 읽으며 결국 이 시리즈 4권 중에 3권을 읽어냈다. 


이 책은 1장 자신의 쾌락을 꿈꾸기, 2장 자기 연마, 3장 자기와 타인들, 4장 육체, 5장 아내, 6장 소년들 그리고 결론으로 이루어진다. 솔직히 2 장말 고는 나에게 영양가가 없었다. 남색과 결혼, 소년애, 해몽술 등은 나에게 와닿지 않았고, 오히려 2장을 돋보이게 하는 단역 같았다. 2장 자기 연마를 위해서 이 책이 출간된 것일 수도?


  무튼 푸코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자기 배려를 통해서 스스로를 만드는 것을 이야기한다. 2장의 제목인 자기 연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를 강화하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자신은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도 포함이다.) 2권에서 푸코는 절제를 통해 존재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자기 배려 혹은 자기 연마란 그것과 어떻게 다를까? 


  2권에서 말하는 쾌락의 활용 즉, 절제는 쾌락에 예속되지 않고 그것을 스스로 통제할 줄 아는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절제란 쾌락에서의 탈예속화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자기 미학을 말하는 것 같다. 반면에 3권은 탈예속화를 이룬 후 주체가 어떻게 스스로를 형성하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욕망에 예속된 자는 욕망에만 따르면 된다. 하지만 욕망을 벗어나고, 그것을 통제한 주체는 어떻게 해야 진정한 주체로 거듭날까? 


  푸코가 말하는 자기 연마란 주체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만드는 과정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개발하는 것이 자기 연마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자기 연마(자기 배려)란 무엇일까?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상당히 많은 담론에 노출되고, 그 담론에 의해 생성된 권력에 예속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는 주체가 아니라 만들어진 주체이다. 마치 푸코가 '감시와 처벌(1975)'를 통해 말하는 바와 같이. 반면에 자기 배려는 타자에 의해 자신을 만드는 것이 아닌 스스로 자기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 유행에 이끌려서 자신의 취향을 형성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미학을 유지한 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이야 말로 자기 배려를 훌륭히 해내고 있는 현대인일 것이다. 


  주변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그의 지인은 자기 자신이 밥 먹을 돈은 없어도, 자동차에 주유할 돈은 있다고 한다. 즉, 자신은 굶더라도 자신의 차는 기름이 가득 차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차는 그렇게 끔찍이 아끼는데 왜 그분은 자기 자신은 아끼지 않을까. 물론 본인의 자유이긴 하지만 말이다. 자기 배려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스스로를 형성하는 존재의 미학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린 이것을 행하고 있을까? 우리는 수많은 접점들로 세상과 연결되어 있어서 자신을 갑자기 바꾸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핸드폰과 같은 물건은 약간의 돈만 있으면 쉽게 교체하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과는 반대로.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자기 형성을 통해서 진정한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말할 것이다. 물건을 사는 것은 그럼 존재의 미학을 벗어난 것인가? 꼭 스스로만을 가꾸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만약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내게 던진다면,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물건의 목적은 당신을 꾸미는 것이에요." 우리는 물질에 종속된 채 그 물건 만을 목적으로 삼는다. 하지만 자기 배려를 통해서 우리는 물질은 그저 우리 자신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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