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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Mar 25. 2023

Double bind

Double liaison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 Derrida, 1930~2004)

  어제 "biodiversity and its stories"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청강하러 성균관대에 갔다 왔다. 덕분에 5년 만에 혜화 근처에 갔다. 어제는 자주 컨택하는 친한 교수님과 함께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맨날 학교에서만 뵙다가 서울에서, 그리고 뭔가 학문적인 세미나를 같이 간다는 점에서 평소와 많이 달랐다. 세상에 내가 학술 세미나에 가다니. 세상에 내가 영어로 된 세미나에 참가하다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 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어제는 특별한 날이었다. 맨날 강원도에서 뵙던 분을 서울에서 뵙고, 흔히들 서성한이라고 하는 명문대에서 세계적인 학자의 세미나도 듣고, 평소와는 많이 다른 하루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손꼽아 보자면, 성균관대에서도 강의 중에 딴짓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점, 몇 달 뒤 학회에서 볼 교수님들을 미리 뵙고 인사드렸다는 점 그리고 Simon C. estok, Ursula K. heise과 인사를 나눴다는 것이다. 사실 내 분야의 학자들이 아니라 난 잘 모른다. 하지만 이 세미나를 참석하게 도와주신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굉장히 유명한 세계적인 석학이라고 하시고, 세미나 며칠 전부터 계속 서치 해보니 진짜로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Estok 같은 경우는 악수도 나눴는데, 사진도 찍을 걸 그랬다. 다음 6월 학회 때도 꼭 오셔서 내 발표를 들어주시고, 아는 척해주셨으면 좋겠다. 


  학회 전후로 교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항상 교수님을 뵈면 평소에 하지 못하던 대화를 하게 된다. 권력관계 속에서의 말하기라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이것도 하나의 파레시아가 아닐까. 평소엔 친구들에게 학문적인, 진지한 혹은 비판적인 담화를 나눌 수가 없는데, 김 교수님을 뵈면 그런 담화가 가능해서 좋다. 이 분을 몰랐다면 난 대체 누구와 그런 대화를 나눴을까? 아니다. 이 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인문학을 하지 않았겠지?


  항상 사회, 인문학 등 남들이 보기에 고리타분하고 어려운 대화라고 생각할 만한 대화를 나눴는데, 어제는 주체에 대해 담화를 나눴다. 아마 만나자마자 내 논문을 드려서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날의 주제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드린 논문은 내 졸업논문인데, 소셜 미디어와 현대인들의 주체성의 소멸에 대해 연구한 논문이다. 그래서 어젠 계속 주체와 진실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것 같다. 


  어제 나눈 대화를 다 쓰려면 기억하기도 힘들고, 분량도 매우 방대하다. 11시에 뵙고, 4시 반에 헤어지고, 그 사이에 두 시간은 세미나였기 때문에 두 시간 반정도의 대화이지만, 정말 밀도 높은 두 시간 반이었다. 그래서 하나의 핵심 개념만 복기해서 글로 쓰려고 한다.


주체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주체가 될 수 없고, 예속되지 않을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주체가 되어야 하고, 탈예속화해야 한다." 어제 내가 생각해 낸 문장인데, 뒷부분은 내가 맨날 주장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제 왜 저 앞부분이 생각났을까. 난 맨날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글을 쓰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떻게 완전한 주체적인 주체가 될 수 있을지 사색에 빠진다. 하지만 어제 느낀 건데, 100%의 주체는 불가능하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자신이 정하는 것 같은 100%의 주체는 사회가 속할 수가 없다. 만약 그러한 주체가 된다면 그는 굉장히 유아론적인 존재일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자신의 무대이며, 다른 사람은 모두 조연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타자는 타자의 인생에서 주인공이다. 그래서 혼자 살지 않는 존재라면 100% 주체가 될 수 없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 있고, 재력이 있다고 해고, 100% 주체로써 사는 것은 칸트가 부정하는 행동규범처럼 타자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에 윤리적이지도 않을 것이며, 과연 그것이 존재적으로 가능할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우리는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걸까?


  최근에 데리다에 대한 책을 읽었다. 강남순 교수님이 쓰신 책인데, 데리다를 입문하기에 아주 좋은 책인 것 같았다. 덕분에 나도 데리다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데리다에 대해 아주 얄팍한 지식도 가지게 되었다. 데리다는 흔히 해체로 유명한데, 저번 독서로 인해 데리다에 대한 편견들을 버리게 되었고, 왜 일부 학자들이 데리다를 부정하는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더블 바인드(Double bind)

  데리다의 사유들은 굉장히 신박했다. 포스트모던스러우며, 당연하다 생각한 것들을 모두 의심했다. 데리다의 철학을 잘 모른 채, 그의 명제들을 보면 말장난인가 싶을 거다. 만약 나도 설명 없이 그냥 데리다의 글을 짧게만 봤다면 뭐 하는 사람인가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친절한 입문서 덕분에 나는 혼동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었다. 


  더블 바인드는 정말 이 세상을 관통하는 단어인 것 같다. 플라톤식으로 말해서 분명히 우리는 이데아처럼 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이데아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게 더블 바인드다. ~~ 가 필요하지만, ~~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포기해야 할까? 


  만약 100이 되는 것이 어려워서 포기했다면 그냥 0일 것이고, 어려워도 계속한다면 100은 아니지만 뭔가를 이룰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100억을 모으려고 한다고 해보자. 이를 더블 바인드로 보자면 "100억을 모아야 하지만, 100억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하다."가 될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100억을 모으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운이 좋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이 사람이 100억을 모으려고 마음만 먹고, 어려울 것 같아서 포기한다면, 그는 0원을 저축했을 것이다. 즉,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100억을 모으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알아도 꾸준히 노력한 사람은 100만 원이라도 모았을 것이다. 


  더블 바인드를 주체 문제에 적용시키자면, 우리는 주체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린 주체가 되어야 한다. 완전한 주체는 불가능하다. 마치 이 세상의 침대가 침대의 이데아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하지만 그럼에도 침대의 eidos를 계속 높여서 100이 아니라 99, 99.5, 99.99 등 100에 가까운 지수를 가진다면 그건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뭐라도 시도를 했으면 조금이나마 흔적이 있다. 


  결론은 우리는 주체가 될 수 없지만, 그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자신의 순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100% 자유로운 인간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유 0% 인간보다 자유 5%의 인간이 더 행복하고, 그보다 더 높은 %의 자유를 가진 사람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더 불가능한 자유를 갈망하고, 될 수 없는 존재가 되기 위해 더 발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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