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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 Sep 16. 2022

출장 간 남편을 쫓아가서

창원에서 혼자 먹고 혼자 놀고 남편이랑 같이 자기


이번 내 여행의 콘셉트는 일종의 북캉스였다.

읽고 그리기. 아이패드를 반년 만에 가장 잘 활용했다.

집에서는 잘 읽어지지 않던 책들을 하루에 한 권씩 읽었다.

오타가 많아서 한심한 책도 있었지만 당장 책 한 권 쓰고 싶어졌으며 40년 인생 처음으로 그림 그리기가 재밌다는 걸 깨달았다.


일주일간 카공족으로 지냈다. 카페에 지불하는 돈이 커피값이 아니라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부동산 점유 비용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5~8시간 머물면서 대개 음료 2잔에 베이글, 조각 케익, 젤라또 브라우니 등을 추가해 매일 1, 2만 원씩을 써버렸다.

스타벅스 창원상남동R점 :: 가로수길 카페 디젤 :: 단미 디저트 카페

음료 한 잔으로 끝나지 않은 건 순전히 배가 고파서였기도, 이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였기도, 잘 꾸며놓고 맛도 좋은데 입지 때문인지 손님이 너무 없는 것 같아서였기도 했다. 솔직히 오래 버티고 앉아 화장실 들락거리는 게 괜히 눈치가 보인 날도 있긴 했다.

하루는 사장님이 직접 로스팅하시는 냄새에 홀려 다른 종류의 커피를 한 잔 더 시켰는데 천 원에 리필받았다. 4천 원을 번 기분이 들어서, 좋았던 기분이 더 들떴더랬다.

그리고 스벅은, 기본적으로 화이트 노이즈의 음역대가 높은 편이더라.


사실 이번 창원 여행은 남편의 출장을 따라간 거였다. 2개월 전쯤 미리 일정이 나온 터라 여름휴가를 아껴뒀었다. 낮에는 일을 보고 밤에는 데이트를 하자는 계획이었다.

점심 혼밥은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첫날 베이글과 케익으로 점심 및 간식을 해결하고 보니 둘째 날부터는 제대로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랜차이즈보다는 이왕이면 지역 상권을 이용하기로 했다.

덮밥을 먹으려고 간 식당에서 ‘텐동’을 시켰다. 튀김 덮밥류이긴 한데… 튀김들 뒤에 세로로 박힌 접시는 뭘까?

덮밥 장사장 창원점          ::          고쿠텐 창원용호점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지.’ 나의 촌스러움에 혼자 민망해하며 새우튀김을 한 입 베어 물고 슬쩍 검색을 했다. 검색창에 ‘텐동’까지 치니 하단에 ‘텐동 먹는 법’이 뜬다. 나만 모르는 게 아니구나 싶어 괜한 안도감이 든다. 접시에 튀김을 옮겨 놓고, 수란과 소스가 뿌려진 밥을 비벼서 함께 먹는다. 이렇게도 배우는구나. 밤에 남편한테 자랑했다. 다행히 남편도 몰랐고, 큰 관심을 보여서 유일하게 두 번 방문한 식당이 되었다.


용지호수공원은 천천히 걸어도 20분, 아침 산책 삼아 세 바퀴를 도는 데 50분이 걸렸다. 러닝화가 있었다면 가볍게 뛰어도 좋았을 텐데 맨발에 샌들 차림이라 참았다.

그날 오후엔 호수 공원 뷰 카페에 갔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이라 일기예보를 믿고 비가 그칠 때까지 몇 시간 묶여있었다.

갤러리 카페 아트지

온종일 한 가지를 흠뻑 즐기는 것도 괜찮은 일이었다.


여행의 묘미는 마음이 여유로워진다는 데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한 남편은 휴대폰도 꺼놓고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거의 12시간 만에 퇴근을 해서는 나랑 저녁만 먹고, 같이 일하는 형님과의 술자리에 불려 갔다. 이틀 연속된 밤 외출. 평소 같았으면 입이 댓 발 나왔겠지만 나는 나름대로 휴가를 잘 즐기고 있었고, 이상하리만치 남편 입장도 잘 이해되었다.

한 번 깊은 빡침이 있었던 순간도 있긴 했다.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서 숙면을 방해하더니, 아침에 내가 쓸 새 수건까지 써 버린 것. 썼던 수건 다시 쓰는 게 대수랴, 나의 하루를 망칠 순 없지. 프런트에 전화해서 수건 한 장 정도는 더 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타지에 가면 낯선 길 찾기를 피할 수 없다. 군대에서부터 독도법에 통달했다는 남편 덕분에 같이 있으면 내가 직접 지도 읽을 일이 없는데 이번엔 독박. 남편 신발 밑창이 살짝 벌어졌다고 해서 접착제를 사려고 찾은 다이소, 지난주에 철분 부족으로 튕겼던 헌혈에 재도전하려고 찾은 헌혈의 집. 한 번에 성공했다.

가장 큰 도전은 가로수길이었고 생각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창원이 계획도시라 그런지, 내가 찾는 곳들이 다 인적 많은 곳에 있어서인지 사실 찾기가 어렵진 않았다. 방향만 잘 잡아 쭉 직진 후 좌회전하면 끝. 시도하지 않았다면 가장 멋진 하루를 놓칠 뻔했다.

가로수길 브런치카페 오프트


5박 6일을 머물렀지만 점찍어둔 라멘집과 베이커리 카페 한 군데는 결국 못 갔다. 왜 우산을 안 챙긴 날에만 비가 오는지, 편의점에서 우산 하나 사는 돈은 왜 아까운지… 뭐, 못 가본 곳에 대한 궁금증과 아쉬움이 좀 남는 것도 괜찮다.

그런데 더 큰 아쉬움은 엉뚱한 데서 만났다. 울산도 명색이 광역시인데 창원특례시에 일주일 머물다 오니 공업탑로터리(이름도 어쩜?)가 어찌나 초라해 보이던지... 낯설다.


긴 외출로 인해 우리 집 냄새가 달라졌고 생활 리듬도 깨졌다. 잘 쉬다 온 것 같은데도 거울 속에는 퀭한 사람이 있다.

요리와 설거지, 청소, 세탁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시간이 끝났지만 다행히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이 더 좋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패턴은 유지하고, 제대로 먹고 운동도 다시 해야지.

이번 여행의 수확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게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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