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해 Dec 31. 2022

남편 대신 시누이들과 함께 최고의 크리스마스

심보 곱게 제주 보내주고, 지오디와 함께 20년 전으로

11월 14일.

남편이 조심스레 말했다. 12월 25일에 제주도 2박 3일…….

두 가지 마음이 일었다.

'하필  날짜에? 그래도   없지, . 크리스마스가 대수인가?'

'그게 무슨 소리야! 일정 조율한 사람 누구야?'

솔직히 말하면 첫 번째 마음이 조금  컸지만 일단 두 번째 모드를 발동했다. 우위 선점.


11월 15일.

   툴툴거리는 척하다간  연말이 뭉개져버릴  같았다.

그래서 하루 만에 마음을 접었다. 면세점에서 스틱이나 하나 다 달라고 해야겠다. 빠른 포기.


11월 16일.

매일 산책을 하니 하루 100원씩 모으는 것도 나름 쏠쏠하여 캐시워크를 깔아 뒀다.

그런데 하단에 기사 제목 뜨는 종종 거슬렸다. 신경  쓰면 되지만 보이면  궁금하잖아?

그날 보인 기사는 김태우가 예능에 나와서 god 완전체 콘서트 소식을 전한 것. 호오!

평소 TV 프로그램 내용을 요약해서 기사화하는 것에도 회의적이었는데 이게  떡이냐.

싫은 거+싫은 거=좋은 정보.


11월 17일.

지오디 콘서트 날짜나 한 번 검색해 볼까?

어라, 막콘이 크리스마스!! 그것도 부산!!!

HOT 팬들이었던  친구들을 꼬드기는 대신, 왕년에 하늘색 풍선  흔들었다는 큰 시누 섭외 완료.

예매가 시작된 지 벌써 3주나 지나버려서 VIP석은 연석이 없지만 나름 앞쪽의 R석 2매 획득.

매진이면 어쩌나 걱정했던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

신랑이 미안하긴 했던 모양. 적극 협조.


11월 18일.

큰 시누만 지오디 팬이 아니었어?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시누랑 중학생이었던 작은 시누가 같이 콘서트에 갔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타지에 사는 작은 시누 접선 시도.

동생이 티켓 쏜다는데 안 갈 리가 있겠냐며 쿨하게 합류.

반대쪽의 R석 3매 다시 예매. 순탄하군.


11월 19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좌석표 모양이 이상하다.

게다가 어째서 그 좋은 좌석이 2매씩, 3매씩 남아있었을까?

알고 보니 우린 앞뒤로 나란히 연결된 표를 구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한 자리씩 남은 자리가 같은 칸이었던 것.

콘서트에 가 본 적 없다는 남편은 보조무대 이미지를 보고 착각한 것 같단다.

아니면 혹시 8열 5번, 9열 5번, 10열 5번이라는 그 ‘열’ 때문에 헷갈린 걸까?

엄밀히 따지면 8행 5열, 9행 5열, 10행 5열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건 매번 헷갈린다)

셋이서 손 잡고 공연 볼 것도 아닌데 아무렴 어때. 상관없지.


그러고 5주 동안…

음원 스트리밍 앱에서 지오디 노래 25곡을 골라 한 달간 무한반복.

처음엔 반가운 멜로디에 눈물 날 듯 왠지 울컥했다.

후렴구 정도만 따라 부를 수 있었던 내가 점점 랩 가사까지 줄줄. 나에게 이런 열정이 남아 있었구나.

필요한 건 뭐다? 반복 학습.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선물을 겸하여 남편에게 코듀로이 캡모자를 주고, 하늘색 니트를 받았다.

콘서트 출격 D-1. 준비 완료.


12월 25일.

'하풍봉'을 사기 위해 콘서트 2시간 전에 벡스코에 도착했다.

시누이들과 셋이서만 외출한 건 처음인데 쪼그리고 앉아 건전지를 까 넣는 모습을 보며 서로 웃고 열심히 사진도 찍어댔다.

앞뒤로 나란히 앉아서 보는 콘서트도 괜찮았다.

"오빠!"를 외치기엔 쑥스러웠지만 떼창에는 기꺼이 동참했다.

조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 이모, 숙모의 풋풋한 설렘.

얘들아, 우리도… 놀 줄 안다.


12월 26일.

어제는 휴대폰이 방전됐고 오늘은 목소리가 방전됐다.

찍어 온 동영상과 사진들을 확인하고 형님들과 공유하다 보니 여전히 콘서트장에 있는 듯하다.

지겨울 줄 알았던 곡들을 새로운 마음으로 또, 반복 재생.


12월 27일.

오랜만에 만나 2박 3일 동안 각자에게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나누느라 바빴다.

(결코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신랑~

벌써 왔어?




지오디가 데뷔한 해에 고등학교에 입학해 3년 내내 함께 했다.

수능을 망쳤을 때 발표된 곡이 '길'. 반갑지 않았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애증의 곡이다. 나에겐 위로가 필요했는데 한 치 앞도 모르는 내 상황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것 같았으니까.


음악은 20년 전의 나를 만나게 했다.

이제는 쪼그라들지 않은 마음으로 '길'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의 나를 충분히 위로해 주었다.


2023년의 길목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출장 간 남편을 쫓아가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