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동구는 초록색 멜론 우유를 벌컥벌컥 잘도 마시던걸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지독히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그건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혼인서약서에 서명하는데
종이에 펜이 걸려 찢어진 것.
당시 공주에 심취해 있었던 나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심하게 이입했고
아, 이를 어쩌나!
진심으로 걱정을 했더랬다.
심지어 그것 때문에 단두대에 올랐을 거라
꽤 오래 믿었고.
난 스스로 완전무결하고 싶은 욕심이 몹시 컸다.
지금은 이면지 알뜰살뜰 모아 메모지로 쓰는데
어릴 땐 자원 절약 따위 내 알 바냐,
스케치북에 여백의 미가 넘쳐났고
똑~같이 생긴 무매력의 공주만 그리면서도
뭐 하나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고민 없이 한 장을 넘겼더랬다.
물을 마시고
쓰레기를 버리는 데
돈을 쓴다는 건 상상만 하던 시절이다.
정수기가 있었지만 맛없는 생수를 굳이?
보리차나 옥수수차를 끓여 먹는 게 대세였다.
500ml 생수를 사 먹는 일이 보편화되면서
나중엔 작은 산소통에 담긴 공기도
돈 주고 사야 할 판이라고 하곤 했지만
아직 편의점에 그런 걸 팔지 않아 다행이지..
그때도 돈 내고 쓰레기를 처리했겠지만
공동주택 관리비에서 나갔을 뿐,
쓰봉이 미어터져라 눌러 담아 버릴 필요는 없었다.
베란다 벽에 달린 뚜껑을 열고
4층 우리 집에서 쓰레기를 툭 던지면
1층 쓰레기장으로 수직낙하 직배송.
행여나 종이 낭비한다고 혼날라치면
들키기 전에 찢어 거기로 던져버리고도 남았겠지.
소중한 내 몸에 상처가 생겨선 안 되기에
무릎팍에 빨간약 바를 일도 결코 만들지 않았고
내 물건엔 흠집도, 낙서도 용납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가을운동회 연습 첫날,
그날따라 겁쟁이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하굣길에 친구들을 따라 높~은 데서 풀썩 뛰어내렸다.
반동을 주어 착지하는 법을 몰랐던 운동무식자로서
양팔을 벌리고 꼿꼿하게 맨땅에 착륙.
발목과 정강이가 부러져 오른쪽 다리가 세 동강 났다.
핀 박는 수술을 하네, 마네 했는데
수술 없이 한 달 만에 나았다.
그때 발목에 보조개 같은 상처가 생겼었는데
그거 하나 가지고 몇 날 며칠을 울었다.
내 다리 꼴도 보기 싫다며.
성장판을 다쳤는지
키가 160cm에 조금 못 미쳐서
좀 더 큰 뒤에는 그것 땜에 땅을 치며 울고 싶었고.
목발 짚고 4차선 횡단보도를 건너는 건 위험하다며
좋아하던 서예학원을 중단한 것이
지금은 제일 아쉽다.
6학년 때 찰흙 준비물이 있던 날,
빨간색 찰흙판 사방에 달린 찰흙칼을
깔끔하게 떼어내고 싶었다.
가위로 대강 잘라 플라스틱 쪼가리가 남아있는 꼴을 볼 순 없지.
숨을 참고 집중하여 커터칼로,
.
.
.
왼쪽 엄지 손가락을 세로로 베어버렸다.
4 바늘을 꿰매고 오느라
찰흙도, 찰흙판도, 찰흙칼도 쓸 일이 없었다.
그리고 피아노 수업을 중단했다.
피아노를 늦게 시작해서
이제 막 체르니 30번의 1번에 들어갔는데,
이제부터 진짜 집에서도 연습할 참이었는데.
인생 참 뜻대로 풀리지 않네, 했을 뿐
발목도 아니고 손에
예전보다 훨씬 더 큰 흉이 졌는데
정작 그땐 울지 않았다.
그만큼 성숙한 게 아니라
나의 완벽이 깨지는 순간을 하나, 둘 맞이하면서
나 스스로를 하나, 둘 포기해 버린 거다.
글러먹었어.
될 대로 되라지.
지금 생각하면 그깟 게 뭣이라고, 할 일들이지만
아무튼 그랬다.
모든 게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들 같았고
완벽에서 한참 벗어나버린 내가 싫었다.
<행운에 빠진 고동구>의 동구는 달랐다.
좋아하는 채린이와 동이가 쑥덕쑥덕.
'마법사 루루 공주' 책에서 9월이 생일인 친구에게는 행운의 색이 핑크란다.
동구와 동이 쌍둥이 남매는 9월에 태어났고,
동이와 달리 동구에게는 핑크색 물건이 없는데!
게다가 동구가 좋아하는 초록색은 하필 9월생을 방해하는 색이고.
동이방을 기웃기웃,
엄마의 매니큐어라도 챙길까,
여자 색이라고 놀렸던 현도의 핑크색 지우개까지
핑크를 찾아 헤매던 동구는
3반과 축구하던 날, 승부차기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친구가 준 초록색 멜론 우유를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
동구는 마법사 루루 공주 대신 스스로를 믿기로 한다.
멜론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고,
승부차기 성공.
난 완벽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요행을 바라고
우연한 불행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뭔가 나쁜 게 있으면 운이 안 좋았다는 핑계를 대려던 게 아닐까?
한 번의 삐끗으로 생사가 갈릴 수도 있는데
오히려 감사했어야 했다.
다행히 언제부터인가
인생은 Yes / No 심리테스트 같은 거란 걸 깨달았다.
한 번쯤 잘못된 선택을 했어도
그다음에 옳은 답을 찾아가면 종내 제대로 된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내 유년기와 청소년기가 더 반짝였을 텐데 아쉽다.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지 모야.
욕실 누수 때문에 우리 집과 위아랫집이 모두 난리다.
매매 계약할 때 펜에 걸려 종이를 찢어먹은 것도 아닌데 왜!
미신 말고 나를 믿고 싶은데
그냥 오래된 아파트라 그럴 뿐인 걸 알면서도
남편과 내가 쌍으로 삼재라 그런가, 또 엉뚱한 탓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