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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 Nov 09. 2022

귀동냥 기술 말고 최소한의 책임감부터 길러주세요

서당 근처로 이사 간다고 다 맹모가 아냐

 우연히 학생의 연산 학습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분수의 통분이나 약분 문제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언뜻 봐도 엉터리인 답들이 죽 적혀 있더군요.

 “이거 네가 푼 거니?”

 아이는 아무 대답 없이 멀뚱 쳐다봅니다.

 “혹시 그냥 되는대로 답만 써넣은 거니?”

 여전히 대답 없이 고개만 가볍게 끄덕.

 어머님은 선생님이 오시기 전에 문제지를 다 풀었는지만 묻고, 연산 선생님은 채점을 하지 않기로 합의된 상황이었어요. 그 아이는 제 수업에 올 때도 책을 대강 훑듯이 읽어 왔고 어머님은 그걸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하셨는데 다른 과목들도 마찬가지였던 거죠. 어차피 효과가 없을 게 뻔한데 수업을 유지할 필요가 있나요?


 학원에 그야말로 가방만 들고 다니는 아이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습니다. 가끔은 가방조차 안 들고 오는 경우도 있죠.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수업을 까먹지 않고 오는 걸 칭찬해 줘야 할 판이에요. 제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는 수업 준비 때문입니다. 독서 토론 수업의 특성상 집에서 책을 ‘제대로’ 읽고 와야 원활한 수업이 가능해요. 책 내용을 잘 숙지하고 있어야 거기에 자기 생각을 덧붙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면서 처음의 생각이 확장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정리하는 의미로 한 편의 글을 쓰고 마무리하죠. 이상적인 학습 목표는 이렇습니다만 현실은 이상을 벗어나기 일쑤입니다.

 학생들의 독서 정확도를 측정하기 위해 독서 퀴즈 사이트를 만들었어요. 5지 선다형 열 문제를, 책 속 문장을 그대로 이용해 내용을 확인하는 겁니다. 그랬더니 정말 적나라하게 티 나더군요. 책을 잘 읽고 퀴즈에서 꾸준히 높은 점수를 획득하는 아이도 있지만 수업 직전에 부랴부랴 푸는 아이도 있고(몇 시 몇 분 몇 초에 풀었는지 확인 가능), 대강 읽어서 함정에 푹푹 빠지는 아이도 있고요(어떤 오답들을 골랐었는지 확인 가능). 수업 때마다 지적하던 내용을 객관적 지표로 들이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 앞부분은 좀 읽다가 뒤는 설렁설렁 휘휘 읽고 와서 눈치껏 수업에 임하는 경우가 있어요. 더 심각한 문제는 아예 책을 끝까지 읽지도 않고 오는 경우입니다. 바빴다고 하네요. 어쩌다 한 번 있는 일이면 그럴 수 있죠. 바빴다, 아팠다, 친척이 왔다, 책이 어려웠다 등등 핑곗거리를 만드느라 창의성이 길러질 지경이에요. 아이한테 몇 번 주의를 줬는데도 반복된다면 어머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어머님의 대답이 더 가관인 경우도 있어요.

 가서 친구들이랑 선생님이 하는 말이라도 듣고 오라고요. 서두에 언급한 어머님도 비슷한 생각이셨습니다. “어머님, 도대체 학원을 왜 보내세요?”라고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맹자의 어머니처럼 이왕이면 서당 근처에서 놀라는 마음일까요? 그런데 그건 본인에게 손해일뿐만 아니라 모둠의 다른 친구들에게도 피해를 주는 행동입니다. 제 수업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매사 이런 식이라면 '이번만 잘 넘어가면 그만이지', '나 하나쯤 뭐 어때'라는 마음을 가르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간호사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병원에서도 의료진의 말을 안 듣고 고집부리는 경우가 있다고 해요. 지켜야 할 수칙은 어기면서 결과에 대해 요구하는 걸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퇴원하셔서 그런 민간요법으로 자가 치료하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는 말이 십분 이해됩니다. 저는 수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과 의료진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것 모두 약속을 어기고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거라 생각해요. 좋은 선생, 좋은 의사를 만나면 다 잘 될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믿고 맡긴다는 말에 힘이 실리려면 서로 손발이 맞아야 합니다.

 제발 아이의 미래를 학원에 맡겨놓고 돈만 내는 호구가 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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