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사로프 Jun 29. 2021

최면은 치료인가

: <큐어>와 <꼭두각시>


억압의 사회에서 필요한 건 나에 대한 통제이다. 튀어나가고자 하는 자아에 대한 형벌은 이미 다들 내재화되어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순응을 해야만 할 시간이 도래했을 때 성공한자와 실패한자로 나뉘게 된다. 이제 이들이 겪게 된 불안 또한 분리되기 시작한다.


성공한 자에게는 현재를 담보할 수 있는 확실한 자산이 필요하다. 그래서 절대성을 상실한 채 파동에 따라 움직이는 이 지구에서 익사 혹은 동사하지 않도록 자신을 균형과 맞추고자 한다. 그래서 이들은 에너지를 끊임없이 창출해야 한다. 아인슈타인이 자전거를 타고 끊임없이 달린 것처럼 멈추면 '다시'는 없는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공한 자의 내면은 논의 사계절처럼 변화무쌍하다.

반면, 실패한자는 자신의 비루한 처지를 달래줄 재물을 찾으면서 연명한다. 이들은 지속된 좌절로 인해 자기 통제의 바닥을 드러낸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가 이 사회에서 부정당하는 건 거부한다. 이도 저도 못하는 속박된 상태에서 이들은 인공호흡기로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주변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룰 수 없는 욕망을 세포들에 각인시키며 나만의 세계를 키우고 만족하고자 한다. 즉 생의 저지선에서 퇴거당할 불안을 삼키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최면은 꿈과 또 다른 매개체다. 꿈은 스스로 깨어나는 걸 전제로 이루어지는 물감의 랜덤워크다. 물감을 물컵에 흩뿌리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물들다가 이내 멈춘다. 그런데 최면은 방아쇠가 필요하다. 최면을 이끄는 자의 신호에 따라 문을 열어가는 일종의 스테이지 게임이다. 그 끝에서 만나는 건 정갈하지 않은 나다. 과거의 나이기도 하면서 현재와 엇갈려나간 모종의 자연상태이다. 형용할 수 없음에서 파생된 불안은 극도의 공포로 다가온다. 나를 마주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낯선 것이다. 대부분의 최면은 이를 트라우마로 정의하고 이를 소멸시키고자 한다. 외부세계와 마찰을 일으키는 걸로도 벅차기 때문이다.



그런데 <큐어>에서는 반대로 이를 해방시킨다. 도화선은 불 혹은 물과 같은 원소들로써 내면의 응어리를 극대화시킨다. 그리고 그건 사람을 죽이게 한다. 기억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몰입된 기괴한 상태에 임하면서. 이렇게 통제에 실패한 개인의 모습은 놀랍게도 위에서 서술한 실패한자 뿐만 아니라 성공한 자에게도 무차별하게 나타난다. <꼭두각시>에서는 수면 위로 드러난 자아를 최면자가 통제하며 그의 세계로 편입시키고자 한다. 안타깝게도 도리어 먹혀버렸지만.


두 영화에서 보이는 대비점은 <꼭두각시>에서는 눈을 감음으로써 모든 감각을 최소화하고 최면에 집중할 수 있는 상태에 임하지만 <큐어>에서는 눈뜬상태임에도 마치 최면당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 마냥 바로 의식의 전이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최면자가 한 행위는 '보여주기'말곤 없을 뿐인데 그만큼 문턱이란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위태로워로 보인다. 그리고 왠지 자신을 편하게해줄 핑계로 삼아버리는듯까지해 섬뜩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존의 방식은 치료라고 일컬어지는 소거법이다. 최면자를 제거한다. 불안을 촉발할 수 있는 환경을 통제한다. 착각이 사실 진짜였다고 세뇌시킨다. 나름 괜찮은 해결책이 도출되고 그렇게 영화는 마무리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제어되지 않은 공포는 확산될 힘을 머금고 우리에게 떠넘겨진다. 그렇게 보여진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모멘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 활력을 보장했던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내가 책임을 물을 곳이 없자 심연에 깊은 방을 만든다. 그곳을 최면을 통해 메꾸는 것이 아닌 비워두는 건 청소에 불과할 뿐이다. 다시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곳에서 희생자들은 계속해서 양산될 것이다.

거대한 힘에 저항할 수 없는 초라한 내가 강구하는건 태초의 나를 찾아가 치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통제의 결과물로서 마주한 스테이지 끝의 보스는 내가 주체할 수 없는 타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