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딸이 되는 것이 먼저...
박사 과정 중 첫 학기에 나는 '노인 세미나'라는 강의를 들었다.
그 당시 아빠의 나이는 69세였다.
생명 연장과 함께 노인의 정의를 나이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해졌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많은 논문에서는 노인 대상자를 연구할 때 65세 이상을 기준으로 잡는 경우가 많은데,
이 기준을 노인의 정의로 삼는다면 당시 아빠는 노인의 범주에 해당되는 대상자였다.
지금은 30대 중후반의 남자가 결혼하는 일은 흔하디 흔한 일이 되었지만 아빠의 시대에 아빠의 결혼은 노총각의 경사였고, 나는 그런 아빠의 막내딸이니 늘 나에게 아빠의 나이는 많게만 느껴졌다.
박사 1학기,
가벼운 마음으로 수강 신청한 선택과목인 '노인 세미나'가 나에게는 결코 가벼운 과목이 되지 못했는데,
이는 단지 막대한 과제의 양에서 오는 부담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매주 새로운 노인 대상자들의 간호학적 이슈를 접하면서 하루도 아빠의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나는 내가 늘 좋은 간호사라고, 착한 딸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노인 세미나를 들으면서 노인 대상자를 접근할 때 갖추어야 하는 간호사의 자세와 나이가 많은 아빠를 둔 딸이 가져야 하는 배려를 생각해보니 나는 좋은 간호사도, 착한 딸도 아니었구나 싶다.
노인의 감각기능 저하와 사회적 고립감의 상관관계는 매우 높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는데, 노인 세미나를 수강하면서 나는 특히 이 주제에 많이 마음이 먹먹했다.
언젠가부터 아빠는 내가 무언가 물으면 되묻는 일이 잦아졌고 글자 읽는 일을 멀리하시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엄마와 대화하기를 더 편해했고 책을 읽지 않는 아빠에게 괜한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청력과 시력의 저하는 세상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차단하는데
간호학을 공부하고 있는 딸인 나는 아빠의 이런 상황에 먼저 다가가 의사소통하려고 하지 않았다.
노인 세미나 마지막 수업 날
'본 과목을 통해 무엇을 얻었고 간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무엇을 기여하고 싶은가?'라는 교수님의 마지막 질문에 나는 소박하지만 가장 어려운 나의 꿈을 이야기했다.
"노인 세미나를 들으면서 수업시간마다 아빠를 생각했습니다.
박사 1학기, 시작은 늘 원대한 꿈으로 간호학에 내가 무엇을 기여할 수 있을지,
노인을 대상으로 한 어떠한 좋은 연구를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이 과목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종강하는 오늘 나는 좋은 간호사, 우수한 연구자가 되기 이전에
노인 대상자인 아빠에게 한없이 좋은 딸이 되고 싶어 졌습니다.
그 바람을 갖은것이 내가 이 수업을 통해 얻은 가장 크고 값진 변화입니다."
나는 그 이후로 아빠에게 좋은 딸이었을까?
아빠를 보낸 지금 돌아보면 더 잘하지 못한 내 모습만 생각난다.
아빠
부족한 내 모습, 모났던 내 모습 다 용서하세요.
그리고 그곳에서 아무 걱정하지 말고 행복하세요.
우리 나중에 꼭 다시 아빠와 딸로 만나요.
그때는 더 잘할게요.
그렇지 못하더라도 또 이해해주세요.
늘 그러셨던 것처럼....
아빠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