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어디까지가 갑질인가?
"갑질"
: '갑질'이라고 검색하니 '갑을관계에서의 ‘갑’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인 ‘질’을 붙여 만든 말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한다.'고 되어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갑질'일까? 행위를 하는 사람과 행위를 당하는 사람의 생각이 다르다 보니 '부당행위'라고 말하는것 역시 애매하다.
질문을 하나 던져보려고 한다. 회사 신규직원들의 장기자랑 강요, 갑질인가?
[나는 강력히 갑질이라 생각했지만, 내가 근무했던 곳의 사람들은 나에게 친화력이 부족하다고 했다.]
내가 근무한 곳은 한 건물안에 여러개의 사회복지시설들이 있었다. 한개의 법인에서 운영하는 시설들이라 워크샵 등 큰 행사를 함께 했다. 워크샵 때는 반드시 그 해 신입직원들이 장기자랑을 해야했다.
선배들을 향한 존경의 마음으로 춤, 노래 등을 할 수 있겠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성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정말 피하고 싶은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해에 새로 뽑힌 직원들은 모두가 신입으로 보는데, 나는 다른 회사에서 경력이 5년정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해에 새로 들어왔다고 해서 장기자랑에 합류해야만 했다.
[과장으로 당해년도에 입사한 사람들도 장기자랑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경력이 있으니 신입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장기자랑을 한 그해에는 신입직원들이 10명 가까이 되었는데, 신입직원이 적어서 팀을 구성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작년에 입사한 사람들까지 다 함께 장기자랑을 해야만했다. 어쨋든, 신입 직원들이 모두 모여 제비뽑기를 했고, 한 팀당 4~5명씩해서 총4개의 팀이 구성되었다. 업무시간 중에는 장기자랑을 연습하면 안된다는 암묵적인 명령아래 퇴근시간 후 장기자랑을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
업무로 찌들여진 얼굴과 짜증섞인 목소리가 가득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장기자랑이 하기 싫어서 퇴사생각이 든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다리라도 다쳐서 장기자랑을 못하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만약 임신중이거나 다쳐서 그 해에 장기자랑을 못 할 경우 다음해에 시킨다고 한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커다란 짐 앞에 우리는 하루에 두시간씩 연습을 강행했고 무대앞에 섰다. 춤을 추고 있으면 영상을 녹화해서 시설 홈페이지에 올린다고 하는 말에 우리팀은 가발, 마스크, 선글라스, 장갑까지 준비해서 내가 누군지 알아 볼 수 없게 했다.
[퇴사하더라도 영상은 지워주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죽을 수는 없으니 춤을춘다는 마음으로 장기자랑 무대로 올라갔다.
[소주를 마시고 올라갈까 생각도 했지만 술이 약해 포기했다. 즉, 제정신으로 올라가기 힘들었다.]
지금도 무대위에서 내려다 본 사람들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데, 누군가들은 '불쌍하다.'는 표정, 누군가들은 '재미있겠다.'는 표정들이었다. 동물원 원숭이가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면 내가 비약적인걸까?
제일 앞 좌석에는 팔짱을 낀채 신입직원들의 춤을 구경하고 평가하기 위해 앉아있는 관장과 부장이 보였다.
[관장이 1등에서 3등을 뽑아서 상품을 제공했다.]
그 얼굴이 어찌나 미워 보이던지 몇년이 지난 지금도 팔짱낀을 낀채 누런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의 무대가 끝나고 다음 차례는 남성직원이 있는 팀이었다. 남성직원들은 흡사 인어공주와 비슷한 복장을 하고 무대에 서 있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팀의 팀장이 관장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하니 여장을 하라고 권유(?)했고, 노출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인어공주 역할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 남성직원은 지금도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굴욕적인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남성도 수치심 이라는게 있다고 호소하면서 말이다.
그해 겨울의 직원워크샵은 그렇게 끝이났다.
내가 조금 과하게 느끼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나는 수치심과 함께 약간의 트라우마가 생긴듯 하다. 그 해 장기자랑에 사용했던 음악만 들어도 기분이 나쁘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고 그 다음해,
이른바 갑질사건이 터졌다. 서울의 모 병원 간호사들에게 장기자랑을 강제로 시켰는데, 그게 문제가 된 것이다. 뉴스에서 대대적으로 그 사건을 다루었고 내가 근무하는 곳에서도 우리가 당한것이 갑질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듯 했다. 그해 겨울, 당연히 장기자랑은 없어졌고 전직원이 참여하는 레크레이션으로 워크샵이 진행되었다.
[관장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은 "요즘 애들은 참 별나다."며 아쉬워 하는 모습이었지만...]
사람들의 사회복지를 책임지는 곳에서 조차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니 씁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해 겨울, 간호사들의 입바른 소리가 아니었다면 신입직원들에게 춤과 노래를 강요하는 문화는 과연 사라질 수 있었을까? 목소리 높여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가던 그들이 너무나도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그 심각한 갑질문화에 기가 죽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 했지만 누군가는 불편하다고 외쳤고 그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원하지 않는 사람을 춤추게 만드는 것은 갑질이다.'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다양한 감수성이 더 높아졌으면 좋겠다. 물론 과도한 감수성놀이로 누군가를 마녀사냥하고 증거도 없이 범죄자로 몰아 넣어서는 안되겠지만 말이다.
나는 즐겁지만 다른 사람은 괴로울 수 있다는 것, 나는 흥미롭지만 다른 사람은 흥미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나와 다른 사람의 다른 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조금 더 편안한 세상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