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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ff Jung Nov 09. 2022

그녀는 사실 콧구멍이 세개인데

earip 이아립 <멍든 새>

earip이라는 짧디도 짧은 스펠링으로 쓰고 이아립이라고 읽는다.

한글, 영문 이름에서도 향취를 느낄 수 있다. 나가 혼자 선당께, 범상치 않겠지?

1990년대 월간 Sub 잡지에 실렸던 ‘스웨터’ 밴드 속의 그녀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비니를 쓰고 보이시한 얼굴에 아마 도전적인 눈빛을 하고 있었을지도,

그녀를 떠올리면서 나는 깊은 시간의 먼지를 뒤적여야 했다. 곡을 두 곡 정도 마련해야 한다면 현재 시점의 그녀와, 까마득한  시간의 먼지 속에 담겨 있는 거친 사운드 또한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스웨터’라는 이름만큼 상큼한 밴드로 시작하여, 솔로로 홀로서기하고, 자체 레이블을 만들어 수공으로 만든 앨범을 한 장씩 만들어 갈 때만 해도 과연 이 노력들이 오래 갈까 의구심도 들었지만,

이렇게 차곡차곡 발표한 앨범만 벌써 몇 장 째인지,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이렇게 정체되지 않고 푸름을 물들이고 있는지.

25년도 더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도 그녀는 꾸준히 진행형이다. 이것은 느낌표라 할 만하다.

매우 소중한 여성 싱어송라이터라서 그러하고, 비슷한 연배를 우쭐해 하면서 괜히 친근해서 그러하고, 지속의 에너지가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 주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녀의 목소리를 이렇게 칭하곤 했다.

사실 그녀는 콧구멍이 세개인데 그 중 숨겨져 있는 하나가 막혀 있다고...

감히 장난질쳐서 매우 미안하긴 한데, 그 이외에 그녀의 목소리를 표현할 적절한 문장을 만들지 못하겠다.

세 개 콧구멍에 하나가 막힌 콧구멍을 소유한 그녀가 들려주는 목소리는 항상 매우 가까이에서 두텁게 어루만져주는 듯한 아우라를 형성한다.

독립 레이블을 만든 후 발매된 한 앨범은 실로 꿰어 하나씩 포켓에 접어 넣은 수공CD로 만들어 졌고 그녀가 방안에서 일일이 미지의 독자를 상상하며 작업했을 온기에 미소짓기도 했다. 이를 애써 실타래 풀어 플레이어에 집어 넣으면 때로는 발랄하게, 때로는 독백하듯 읊조리는 그녀가 여기 가까이에 있다.

조명은 전구색으로 조금 어두운 감도가 좋겠지. 이아립의 솔로 앨범들 마디 마디에서  호흡이 느껴지고, 방안의 온기가 느껴지고, 서늘한 바람이 홀연히 지나간다.

호흡까지도 노래한다는 말이 있다. 그녀에게 이를 충분히 부여하고 싶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발매된 곡들은 앨범 단위로 무심히 틀어 놓으면 피로에 지친 몸으로 들어선 퇴근 후의 집안의 풍경을 농밀하게 만들어 주는데.


‘스웨터’ 데뷔앨범보다 전에 발매된 제로 앨범이 있다. 그 속에 담겨진 <멍든 새>를 얘기하고 싶다. 반드시 스웨터 1집의 멍든 아이가 아닌 그 전의 EP여야 한다. 1집의 정돈된 사운드와 비교하면 조악하기 그지없지만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은 그런 이쁘고 치장된 것만이 아님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한다. 마치 '브로콜리 너마저' <안녕>이 [1집]이 아닌 EP [앵콜요청금지]의 <안녕>이어야 하듯이.

한개, 단 한개라도 기억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되묻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어이쿠 진짜 아프네.. 많이 멍들었나 보다, 묵직하게 돌직구로 달려드는 아픔에 저항하지 못하고 멍해지는 감정을 처절히 느낄 수 밖에 없다.

earip의 행보를 쫒기 시작했던 것이 그 곡의 멍 때문이었고, 이 먼지 속의 곡은 반드시 누구에게나 다시 드러 내어야 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스웨터 정식 1집의 <멍든 새> 버전은 듣지 않는다.

스웨터 활동 때의 사실 상큼함을 뒤로하고 홀로서기한 네 장의 앨범들은 앞서 얘기 했다시피 하나를 별로 꼽고 싶은 마음이 없다. 앨범들은 퇴근 후 방안의 온기를 덥혀 주는 난로 같다. 손 가는 데로 하나를 뒤적이니 여기 <1984>이란 곡이 잡혔을 뿐.

..그 정도라도 괜찮다.




스웨터 [zero album coming out...] <멍든 새>

https://youtu.be/B0g-Fs5qkO4

이아립 [망명(亡明)] <1984>

https://youtu.be/j12Mth3N4Us?si=nwh7HRakrAoY106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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