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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ff Jung Oct 04. 2023

적벽강의 50가지 죽음

박동진 [적벽가]

판소리 공연을 혹시 본 적이 있는지?

참 감사하게도 20대 스쳐 지나가듯 우연히 들어간 공연장에서, 어느 여류 명창과 고수의 어우러짐이 가득한 한 자락을 직접 감상할 수 있었다. 체력 소모가 많다 보니 중간에 인터미션까지 있고 말이다.

그때 바로 눈앞에서 직접 보고 들은 고수의 추임새와 춤추는 듯한 장단, 이에 맞추어 펼쳐 보이는 애환과 유머가 가득한 이야기 자락은 전율 그 자체였다.

운이 좋게도 그 에너지를 몇 미터 가까이서 고스란히 느꼈던 것이다.


갓을 삐딱하게 쓴 소리꾼이 부채를 턱 꼬나 들고 ‘두랍 더 비트’ 라고 고수에게 신호를 준다.

신이 난 고수는 방망이와 북채를 쥐고 비트를 잡아채니 사방은 플로우로 가득하다.

둠칫둠칫 아니리로 시작해 그때야! 유남생 내 이야기 좀 들어보소. 타령을 시작하는데, 얼씨구!

중모리를 거쳐 자진모리로 흘러 꺾어 지르고 피날레로 흘러간다.

관객들은 파안대소 풋쳐핸졉 손 머리 위로 흥분한 가운데,

똥물에 튀겨 죽일 놈이라고 고수를 호통치며 디스전을 시전 한다.

역시 마틴 루터 킹이 힙합의 기원을 기술한 권리장전 3장 16절 내용과 같이 판소리가 대양을 건너 힙합과 랩 문화에 끼친 영향력은 지대하도다.


국악은 황병기 아저씨의 음악 정도 들어보았던 경험에서 새로운 시각을 넓혀준 소중한 판소리 공연이었다. 이후 레코드샵에 갔었을 때는 거들떠도 안 보던 국악 코너가 좀 더 친근히 다가왔고  괜시리 기웃거리며 한 장 두 장 앨범을 들어보기도 했다. 판소리에는 다섯 마당이 아직까지 전해진다고 한다.

특히 재미있게 들었던 것은 <적벽가>인데.

한국인의 삼국지 사랑은 역시 대단하기는 하다. 예부터 내려오는 설화나 이야기 바탕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 소설이 조선에서 판소리로 화한 유일한 대목이니 말이다.

현대인들도 어릴 적부터 대다수가 즐기지만 (삼국지2?) 이 울고 웃는 공통분모는 시대를 초월해 비슷하게 다가오나 보다.

그중 적벽대전은 삼국지의 삼대 전투라 칭할 정도로 엄청난 스케일에 남다른 해전이 자랑인데, 이를 조선 판소리에서는 제대로 비틀고 희화해 놓았다. 특히 의기양양한 공명선생의 술책에 조조가 쫄딱 망해 도망가는 컨셉을 보고 있자면, 그를 푸르르르 메추리 소리에도 목이 달아났나 눈을 끔벅이는 완벽한 하인배로 그려 놓고 있다. 조선 양반들도 조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가?

전쟁이 벌어지기 전 고향을 그리며 슬피 우는 병사들의 타령을 진중하게 잡는 대목이나, 공명선생이 동남풍을 빌고 주유의 계략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장면, 대패하여 혼비백산 말도 거꾸로 타고 도망가는 조조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그린 자락 등, 소설에서 보았던 원작을 비틀어 듣는 재미가 상당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에게 백미는 적벽대전 그 자체이다.

동남풍을 필두로 그 늠름한 황개가 수십 척의 배를 몰고 화공을 쏘아 올리니, 자기 꾀에 넘어간 조조와 정욱이 화들짝 놀란 가운데 적벽강이 불바다로 변하는 그 씬 말이다.

서로 묶어 놓은 배에 한 번에 불이 버썩 천지가 진동하고 강산은 무너지고, 두 번에 불이 버썩 우주가 바뀌고, 세 번에 불이 버썩 화염이 충천하고 우루르르르, 돛대 와지끈.

멋도 모르는 병졸들의 모습에 시시덕거려 미안하나, 처음부터 희화를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타령은 세상의 죽는 모습이란 다 보여주며 고조된다.

자진모리에 맞추어 혼비백산 죽어나가는 군사들의 가지각색 리듬이 거의 랩과 같이 어우러지니 적벽가의 피날레라 할 만하다.


 수만 전선(戰船)이 간 곳이 없고, 적벽강이 뒤끓어 붉게 되어 불빛이 난리가 아니냐. 가련할손 백만 군병은 날도 뛰도 못하고, 숨 막히고 기막히고, 살도 맞고 창에도 찔려, 앉아 죽고, 서서 죽고, 울다가 웃다 죽고, 밟혀 죽고, 맞아 죽고, 원통히 죽고, 불쌍히 죽고, 애써 죽고, 똥 싸 죽고, 가엾이 죽고, 성내어 죽고, 졸다가 죽고, 진실로 죽고, 재담(才談)으로 죽고, 무단(無斷)히 죽고, 함부로 덤부로 죽고, 떼떼구르르 궁굴며 아뿔싸 가슴 탕탕 두드리며 죽고, 참으로 죽고, 거짓말로 죽고, 죽어보느라고 죽고, ‘이놈 네에미’ 욕하며 죽고, 떡 입에다 물고 죽고, 꿈꾸다가 죽고, 또 한 놈은 돛대 끝으로 우루루루루루루 나서 이마 우에 손을 얹고 고향을 바라보며, 앙천통곡(仰天痛哭) 호천망극(昊天罔極), ‘아이고, 어머니. 나는 죽습니다.’ 물에 가 풍 빠져 죽고, 한 군사 내달으며, ‘나는 남의 오대독신(五代獨身)이로구나. 칠십당년(七十當年) 늙은 양친을 내가 다시 못 보고 죽겄구나. 내가 아무 때라도 이 봉변 당하면은 먹고 죽을라고 비상(砒霜) 사 넣었더니라.’ 와삭와삭 깨물어 먹고 죽고, 한 놈은 그 통에 한가한 치라고 시조(時調) 반장(半章)을 빼다 죽고, 즉사(卽死), 몰사(沒死), 대해수중(大海水中)의 깊은 물에 사람을 모두 다 국수 풀 듯 더럭더럭 풀며, 적극(赤戟), 조총(鳥銃), 괴암통, 남날개, 도래송곳, 독바늘 적벽풍파(赤壁風波)에 떠나갈 적에, 일등 명장이 쓸 데가 없고, 날랜 장수가 무용(無用)이로구나.


‘제비 몰러 나간다’ 로 유명한 박동진 명창은 그 걸걸한 목소리에 입심과 꺾기가 보통이 아니어 이 적벽대전 대목을 그야말로 기막히게 연기를 하신다.

젊은 시절 탁 트인 구성진 앨범 사운드가 더 좋지만, 그래도 소리 대목을 친절하게 자막으로 입힌 영상이 더 쉽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링크를 걸어본다.

이후 국악에 그리 많은 진도는 나가지 않았지만, 어떤 하나의 음악 장르에 대해 좀 더 편안한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큰 자산이었다. 예를 들어 산조 같은 것을 들어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말이다.

우리 소리는 좋은 것이제!

동의한다.

국뽕이 아니라 음악적으로.



박동진 [적벽가] <조조군이 화공에 당하는 대목>

https://youtu.be/sUVX0_21Lmo?si=2A1jxhyACFFQUH4P


자매품 안숙선 [심청가] <심봉사 눈뜨는 대목>도 눈물이 흐르는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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