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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ff Jung Jan 02. 2024

차는 이미 식어버렸고,

Eminem <Stan>

세온 작가님의 클래식 클라우드 전권 일기 중 <페소아는 누구인가> 편은 개인적으로 흥미진진했다. 여러 개의 ‘이명’을 통해 가짜 인격체를 만들고 그 개개의 이름으로 시를 발표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https://brunch.co.kr/@shongi0514/143

예술이란 한 작가의 평생에 걸친 궤적을 따라가는 여정이라고 일반적인 명제로 얘기해 본다. 여기에 반해 매번 다른 개인 서사, 인격체를 지닌 인간이 되어 그 시선이 내보였을 만한 풍경으로 문학작품을 만든다는 것. 그게 가능할 정도의 수준이라면 제한 없는 상상력으로 꿈꿀 수 있겠다 싶어 굉장한 방법론이겠지만, 일면 신기하기도 했다. 다른 인격이 되는 차원은 둘째 치고, 문학작품 속 다른 등장인물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조차 굉장한 능력이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롤플레잉 게임을 할 때 우리는 캐릭터 성향을 질서-중립-혼돈, 선-중립-악의 매트릭스로 9가지 중 고를 수 있다. 롤플레잉 역할 놀이에서라도 다른 삶을 살아보고자 혼돈 악으로 나의 성향을 세팅했던 적이 있었는데 실제 흘러가는 이야기에서 그에 걸맞게 대화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굉장한 에너지가 들었다. 혼돈으로 가득 찬 악을 추구하니 그 이유 없는 악행을 제대로 연기해야 하는데 말이다. 결국 아무에게도 피해 주지 않는 상상의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인격으로의 체험을 매번 실패했다.

그래서 작가들이 그렇게 자신이 구축한 세계관, 그 속의 등장인물, 그리고 진짜처럼 느껴질 정도로 절절한 개개의 감정을 표현해 내는 모습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을 반영하되 기본적으로 허구, 상상의 에너지가 원천인 예술의 세계에서 말이다. 결국 나의 깜냥은 잘 차려진 성찬에 질 좋은 소비자가 되는 것이 제격이다 라고 다시 되뇌어 본다.


Eminem 에미넴의 초창기 작품을 바라보면서 그가 영리하단 생각을 했던 건, Slim Shady란 음악 할 때의 문학적 페르소나를 별도로 내세우며 가사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물론 그의 가치관이 기본적으로 바탕을 깔았겠지만 표면적인 가사는 훨씬 다채로운 방식으로 변형하고 창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내용물이 백인 소외층의 혐오발언들, 폭력, 넘실대는 수위가 동의할 부분은 아니라 하더라도 표현법에서 보이지 않는 벽을 깨는 데는 유효했다고 생각한다.  

다른 필명을 내세운 거친 표현들은 노이즈 마케팅, 혹은 고도의 포장 방법으로도 적절했을 것이다. [The Slim Shady LP]가 발매된 이후 애들 다 물들겠다는 학부모들의 폭풍 같은 비난과는 정반대로 청소년, 젊은이들에게는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으니 말이다. 청소년기는 일부러라도 우쭐해 보이려고 씹원짜리 욕을 내뱉는 시기 아닌가.

그 기세는 대단했을 것이다. 백인이 힙합 한다고 껄떡되냐는 소리가 무색하게 가지고 있는 무기가 너무 많았다. 웃지 않는 잘 생긴 외모, 높은 음역대의 목소리로 약간 긁어내는 독특한 발음, 흑백의 가름을 무색하게 실력으로 인정받는 명확한 래핑, Dr.Dre 닥터 드레의 프로듀싱으로 받쳐주는 음악 자양분. 어려운 환경에서 자수성가한 히스토리, 논란으로 가득 찬 시원하게 터트리는 금기. 그리고 그는 힙합 역사에서 대체 불가의 아이콘으로 1999년 메이저 레이블 데뷔 이래 계속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음악에서 가사는 문학에서의 시, 소설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학 작품에서 작가의 상상력으로 변형되고 제대로 가공된 세계를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논픽션에 관심이 없는 이유이다. 가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한 힙합 또한 좀 더 극적이고 은유적인 표현법으로 가득 찬 음악을 좋아하기에.

Eminem의 음악에서 이를 대변하는 곡으로 <Stan> 스탠 을 얘기하고 싶다. 스토레텔링이 극적인 모두가 인정하는 가장 유명한 곡일 것이다. 처음 들었을 때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Dido 다이도 의 <Thank you>를 원래 좋아했었는데 이를 샘플링으로 잡아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음악에서 흘러나오니 얼마나 놀랬겠는가. 전체 분위기를 잡아주는 그녀의 목소리에 음울한 빗소리, 그리고 이어서 등장하는 힙합 드러밍 비트를 타고 흐르는 그의 플로우. 그 첫 소절에 충격받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Stan>은 [Slim Shady LP]가 발매되고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후 후속작인 [The Marshall Mathers LP]에 수록되어 있다. 앞서 얘기했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학적인 요소와 현실, 허구가 뒤석인 곡이다. 음악은 기본적으로 Slim Shady라는 필명으로 발매된 아티스트의 앨범을 듣고 극성팬이 된 어느 젊은이의 점진적인 광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현실이라는 얘기는 실제 Eminem이 전작에서 그렇게 필명으로 앨범을 내었고 가사의 내용 또한 몇 가지가 실제 발매된 전작 속에서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 이후는 다 허구의 세계에서 구현된 창작물이다. 하지만 왠지 실제 있었던 일을 다루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인데, 그렇다면 그에겐 문학적으로 성공이겠다.


곡은 총 4개의 벌스로 나눠져 있으며 벌스가 전개될 때마다 달라져 가는 화자의 모습을 음악적으로 그려보는 게 이 곡의 가장 극적인 부분이 아닌가 싶다.

1절은 어느 팬이 Slim에게 보내는 팬레터 정도이다. 그가 보낸 두 통의 편지에 아직 답장이 오지 않는 조바심은 보이지만, 그를 너무나 좋아하는 열렬한 팬심만이 가득하다. 때때로 휘겨갈기는 소리를 소스삼아 집중하고 있는 분위기를 돋운다.

2절을 지나며 아무 반응이 없는 그에 대해 상당히 분심이 가득한 표현이 보인다. 그의 우상은 수많은 팬 속에서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었겠지만, 개개 팬에게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모든 것일 수밖에 없다. 난 그와 닮았다고 동질화하게 되고, 그의 행동을 따라 하고, 어느 누구보다도 내가 최고의 팬이라는 마음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미묘하게 변화된 플로우가 이를 대변해 준다.

3절은 이 곡의 가장 클라이막스일 것이다. 완벽하게 화자로 분한 Eminem의 래핑이 그의 분노와 절망을 고스란히 드러내어 준다.

1,2절이 글로 적힌 팬레터였다면 3절은 보드카를 잔뜩 들이킨 화자가 90마일로 고속도로를 밟으며 여자친구와 다리에서 떨어져 죽기 직전 녹음한 음성으로 표현된다. 그에게 필요한 건 단 한 번의 관심이었는데 완벽하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던 팬은 비뚤어진 사랑을 그가 앨범에서 표현한 방식대로 증오로 돌려주려고 한다.

4절은 시간이 흐른 뒤 Slim Shady가 답장을 쓰는 모습으로 마감을 한다. 당연히 일상 너머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그. 여러 가지로 바빠서 보내지 못한 답장에 미안하다는 이야기, 노래 컨셉에 너무 크게 동일시하지 말란 이야기, 애정 어린 조언을 하며 마감을 하려는 찰나,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알게 된 한 미친놈의 이야기를 인지하게 되고….


힙합은 화자인 개인의 역사, 사상을 직설적으로 다루는 부분이 많다 보니 즐겨 찾게 되는 음악들은 한정적이 된다. 더군다나 힙합은 음악에서 가사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보니 적어도 ‘당신이 하려는 소리가 궁금해야’ 들어보기나 할 것이다.

<Stan>을 기폭제로, 이 인간이 뭔 소리를 하는지 궁금하게 되어 여러 앨범들을 이어서 듣고, 영화 <8 mile>까지 찾아보게 된 게 확실하니, Eminem 당신은 어쨌든 나에게는 성공한 힙합 음악가입니다.

미국에서는 2023년을 힙합 탄생 50주년이라고 기념했다. 어떤 이들은 ‘그것 밖에 안되었어?’ 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터인데 의외로 역사 속에서 함께 하다 보면 그런 착시가 들 때가 있다. 그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힙합의 역사 속에서 흑백의 선 가르기를 넘어 정상의 힙합 스타로 살아가고 있는 Eminem의 최애 곡을 한 번은 얘기하고 싶었다.



Eminem [The Marshall Mathers LP] 2000년 <Stan> 가사해석 포함

https://youtu.be/XoX7PxmgmuY?si=MjpVPLXvGqp1dm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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