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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ff Jung Jan 06. 2024

매일 눈뜬 아침이 즐거워 견딜 수 없어.

장기하와 얼굴들 <별일 없이 산다>

이를 테면 이런 이야기.

마음의 친구라 일컬을 이가 한 명 있다. 직접 만나는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고 지지하는 마음을 느낀다. 각자 재미있게 살아낸 후 어느 복사꽃 피는 날에 나누는 대화는 항상 즐거우며,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는 항상 아침에 눈을 뜨면 기분이 좋다고 한다. 이는 작은 설레임 같은 감정인데, 오늘도 어떻게 잘 놀아볼까 머릿속에서 놀 계획을 떠올리기 시작하면 눈뜬 아침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고 한다. 이 감정은 그가 젊었던 시절부터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인데, 그만큼 자기가 하고 싶은 게 확실하게 정해져 있고 삶의 지도를 제 손으로 그려왔던 이가 가질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혹은 이런.

회사를 다닌 지 이십 년이 지났지만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싫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남의 돈을 벌어먹고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 있겠냐만 내가 기분 좋게 선택한 일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서른 살까지 삶의 목표는 내 손으로 일용할 양식을 버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내 노동의 대가로 삶의 양식을 벌게 되었을 때 인생에서 중요한 꿈을 하나 이루었다. 그리고 이 밥벌이를 한다는 행위는 삶에서 중요하고도 소중한 동력이 되어 이어져 오고 있다. 나는 오늘도 즐겁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회사로 출근한다.


남이 행복하고 잘났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드러내는 겉옷은 어떨지 몰라도 일반적으로 내면은 그닥 기분이 편치는 않다. 이건 심리학적으로 당연한 기제일 것이다. 남과 자신의 어떤 비교를 유발하는 이야기들을 들었을 때 오히려 남의 불안과 불행에 자신은 얕은 안도를 느끼고, 남이 행복에 기꺼워하는 모습에 시기 같은 모종의 불편함이 존재한다.

그래서 항상 사회생활을 할 때는 이 기준을 잘 지키면 편하다. 자신이 잘났다는 발언, 너무 행복하다는 발언은 심지어 그렇다 하더라도 그닥 좋지 않다. 공감도 얻지 못할뿐더러 질투 같은 미운 감정만 얻을 뿐이다. 적당히 친한 이들과의 공적인 대화는 나는 당신들과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다는 안도감을 심어주는 전개가 좋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 저 놈의 상사는 앞의 말과 행동이 달라. 월요병으로 너무 피곤해. 돈 들어갈 데 밖에 없고 벌어 놓은 건 없고. 애들 다 말썽이지요, 뭐. 그럭저럭 살고 있지요, 등.'

예전 잘 그어놓은 기준을 간접적으로 살짝 일탈한 적이 있었다.

3차까지 간 직원 회식을 마치고 간 노래방에서 장기하와 얼굴들의 <별일 없이 산다>를 진심을 담아 열창한 것이다. 웃자고 한 노래지만 일부는 약간 뭐 보는 표정을 지었던 기억이 선하다. 처음 들은 노래에 그들은 정말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들었던 것일까? 내가 가사에 담은 진심을 느꼈던 것일까.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하루하루 즐거웁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매일매일 신난다

매일매일 아주 그냥.

 

이 사람 사이에 고만고만하게 정해진 암묵적인 기준들을 허들 넘듯이 가뿐히 즈려밟는 예술인들이 있다. 이들이 하는 일이 결국 ‘낯설게 하기’ 일 것이다.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우리가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중요한 이유. 일상을 낯설게 하기.

 장기하의 이 허들 뛰어넘기는 독보적인 스타일로 음악 하는 새로운 유형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비슷하게 계보를 맞춰보자면 산울림 김창완 아저씨 정도일까? 고민 하나도 없고 사는 게 재밌어 죽겠다는 능청, 남들의 행복에 자신의 기준을 맞추지 않는다는 진정성, 너를 믿는 너가 진짜라는 자신감. 남 눈치 보며 우물쭈물하다간 묘비석에 새길 거라는 경고, 노래인지 나레이션인지 랩인지 희끗한 리듬감까지. 무르익은 시간이 15년이 지난 지금, 그의 독특한 연출은 그만의 음악 정체성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퍼포먼스가 되었다.

예를 들어 최근작인 <그건 니 생각이고>나 <부럽지가 않어> 같은 음악들은 그 은근한 해학에 불편함을 넘어 카타르시스까지 전해 주는 수준이 되지 않았나 싶다.

내가 너로 살어 봤냐 아니잖아

니가 나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한 개도 부럽지가 않어

어?

그만큼 우린 그에게 익숙해졌으니까 말이다. 저 꼴통 또 저런다 그러며…. 이제는 그의 잘났음을 피식 웃으며 인정해 주게 된다. 일반적인 이들과의 사이는 예의를 가지고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슬픔들, 누군가의 깊은 아픔, 어린 마음을 지배하는 상실감이 도처에 있는데 나만 이렇게 즐겁고 행복하다고 외쳐도 될까? 나는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던 누구나 행복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은 전염된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외부와 비교한 기준으로 망설이기 때문일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렇게 말은 얘기했지만 나는 남에게 행복하다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앞서 얘기했듯이 여전히 별로 득 될 게 없는 사회인 것 같기 때문이다. 장기하가 좀 더 거두절미하고 노래하여 이 세상의 딱딱한 모서리를 조금 더 능청스럽게 해체해 주었으면 바래 본다. 비교로 얼룩진 시선들을 각자의 내면으로 돌려주는데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

단지 누군가에겐 진심으로 사는 게 행복하다고 대화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면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해 준다. 누군가의 이 잘남을 단순한 인정을 넘어, 진심으로 지지하고 기뻐하는 이가 있다면 그들이 바로 옛 선인들이 얘기하던 ‘친구’란 단어로 연결될 것이다.

아마 누구나 그런 친구와 함께 새벽 3시까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야, 정말 사는 게 즐겁고 행복해.

응, 맞아. 매일 일어나면 재미있게 놀 생각에 견딜 수 없어.

그리고 이 대화는 10년 후에도 동일할 것을 알고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 [별일 없이 산다] 2009년 <별일 없이 산다>

https://youtu.be/CfXVsHNETq0?si=TRNt7Nj27OZJIQ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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