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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ff Jung Jan 25. 2024

잔상으로 새겨진 애수

OMEGA [Time Robber] <Late Night Show>


최근 가족과 여행을 다녀오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여행은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나름 순조로웠기에, 우린 특히 서로를 대견해하며 ‘여행력’이 증가한 것에 대해 자찬을 나누었다.

모두가 적당히 가난했고,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었던 소년소녀들이 어른으로 내몰렸다고 충분히 여행이란 것을 해 보았을 리가 없다. 아내나 나나 결혼 후 아이를 가지고서야 흔히 얘기하는 여행이란 것을 고민해 보았으니, 처음의 그 서투름이란 안 봐도 뻔했던 것이다. 단지 그때는 그것이 서투른지 조차 몰랐던 것일 뿐.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경험 없이 충분한 성장이 가능하겠나. 그런 아쉬운 과정을 통과했기에 그나마 현재의 여유로운 여행 공력을 자신하는 정도까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예를 들면 여행이란 것도 낯설었던 시절, 아내와 내가 제주도란 곳을 처음 갔었을 때 짠 리스트는 이런 거였다. 정방폭포, 더마파크, 초콜릿 박물관, 인체 박물관, 아트서커스, 잠수함 타기… 이런 장소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 취향의 즐거움은 다른 데에 있었는데, 남들 다 간다는 유명한 코스 위주와 아름다운 자연이 아닌 인공적인 장소를 선택했던 데에 있다. 여행을 해 봤어야 뭐를 알지….

여행력이 나날이 솟아올라 우리가 무엇에 행복해하는지를 인지하고 난 후 짠 리스트는 이런 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한라산 대피소에서 컵라면 먹기, 용눈이 오름, 산굼부리 등 오름 위주의 자연 만끽하기, 김영갑 갤러리에 앉아 그림 보기, 애월읍 작은 식당에서 밥 먹기, 서귀포 도서관 유리창 너머 쉼, 방주교회 카페에서 제주영귤차와 햇빛에 반사되는 비늘 보기, 뭐 이런….

남의 것이 아닌, 우리의 취향을 알아가고 인정하고 이해하며 함께 짜게 되는 여행코스는 훨씬 깊은 만족감을 주었으니 경험이 준 '여행력' 파워 운운할 만하기는 하다.


앞서 제주도를 처음 갔을 때 열거했던 코스들은 마음을 울리는 어떤 반향도 없었는데, 심지어 아트서커스 같은 경우는 보는 내내 무언가 불편하기까지 했다. 관객을 사로잡으려는 과장된 몸짓과 사회자의 목소리는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했으며, 매회 무대는 놀라움보다는 걱정반 두근반의 불안감이 올라왔다. 마지막 철창 바이크 묘기에서는 마침내 두려움까지 일어 내가 왜 여기에 돈 내고 가시방석에 앉아 있지 생각마저 들었다. 접촉사고로 잠시 리듬이 흐트려졌을 때는 정말 나가고 싶었다. 몸으로 연기하시는 이들이 그렇게 혼신을 다하는데 미안함을 느꼈지만, 그 풍경이 주는 불편함은 아마 어린 시절 코흘리개 동네에서 보았던 유랑 서커스의 기억과 함께 짠한 어떤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모르겠다. 어릴 때에는 그런 것을 보면 마냥 행복해하지 않은가? 그런데 옛 기억의 나는 별로 즐기던 표정이 아니었다. 낡은 서커스의 천막이 기둥에 감싸여 올라가던 풍경, 삐에로 분장의 분주함, 외발 자전거 아저씨의 저글링, 원숭이와의 실갱이, 외줄 타기의 위태로움, 서커스의 꽃인 공중 그네까지. 아, 그때도 공중 그네에서 몇 번의 실수로 그물망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었어. 그리고, 더 이상 남아있지 않던 천막의 황량한 자리까지.

난 조숙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 반짝이는 무대복 너머 어떤 삶의 고단함을 느꼈던 것 같다. 살기 위해 이렇게 힘들고 위험한 것을 해 내어야 하는 것인가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즐기지 못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 행복하기 위해 간 여행에서 갑작스레 위험하고도 슬픈 서커스를 보고 있자니 옛 기억들과 겹쳐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찔한 순간들에서는 정말 그만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으리라. 불안의 줄을 밟고 가는 삶이라니 그만 피하고 싶었다.


OMEGA 오메가의 <Late Night Show>를 들을 때면 어린 시절의 그 감정이 함께 스멀거린다. 가사를 읽어보면 비슷한 유랑 극단의 풍경을 얘기하는 듯하다.

이른 새벽부터 준비하는 무대, 별 신경도 쓰지 않는 취한 관객들, 늦은 밤 커튼이 내려가도 만족감을 느껴본 적이 없는 시간들, 구겨진 포스터와 흩어진 쓰레기들 너머로 천막을 철거한 후 다시 떠나야 하는 시간. 야경꾼은 다시 문을 닫으러 오고….

이들의 감정이 무그 신디사이저의 묵직한 톤으로 아래에서부터 저며 올 때, 그만큼의 깊이로 불편한 감동이 함께 한다. 우주적인 사운드에 능한 이들답게 슬픔 또한 무거운 아름다움으로 변모시켜 가슴에 담아두게 한다. 삶의 작은 우울이 모이고 모여 하나로 합쳐질 때 피날레를 향해 날려 보내는 애수는 이 곡의 정점이다. 우리가 어렸던 옛적 헝가리에도 충분히 그런 이야기들이 있었을 거야.


슬픈 감동은 기쁨보다 잔상이 오래 남는다.

좋아하는 곡들이 슬픔 쪽에 좀 더 시선을 둔다면 그건 내 마음속에서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몰라.



OMEGA [Time Robber] 1976년 <Late Night Show>

https://youtu.be/C4A-e19lS74?si=kVjmzlsAzgWedj5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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