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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ff Jung Feb 03. 2024

덩어리로 축적된 미열

더더밴드 4집 <I Won't Stop>

미술관 전시실에 들어설 때 입구의 잔잔한 흥분을 좋아한다. 어떤 서사 같은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큐레이터가 공들여 준비하여 놓았을 하얀 공간의 잔치. 입구를 시작하는 상징적인 문구, 첫 작품이 반시계방향으로 눈길을 끌며 두 번째, 세 번째로 이어지는 길을 튼다. 큰 구심점인 듯 한참을 서 있게 만든 작품을 지나면 돌아 나오는 길은 아쉬움으로 머물게 되고.

혹은 영화라는 작품을 온전히 본 것으로 느끼려면 극장의 암전 속 페이드 인 되는 부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로고가 보인 후, 긴장된 도입부 속 흐르는 화면에 윤곽처럼 새겨지는 제목, 의미를 부여받은 음악. 영상 내내 몰입의 경험은 마침내 느린 크레디트로 서서히 내려놓게 되고, 페이드 아웃되는 마침표까지를 확인해야 흡족한 영화 보기를 마칠 수 있다.

그 큐레이터, 영화감독이 세심하게 조율하였을 작은 요소, 공간의 함축,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읽어 내리고 싶은 마음 같은 건가 보다. 결코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배치하지 않았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은 동일하게 음악에 적용되어 항상 앨범 단위로 듣게 된다. 앨범이란 분명 뮤지션의 흘러가는 역사에서 이정표처럼 내어놓았을 형태일 것이기에, 처음 서사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곡까지 이어진 유기적인 마음을 느껴보려고 한다.

그러하다 보니 항상 음악은 어떤 찰흙 같은 덩어리 형태로 뇌에 축적이 된다.

대다수 곡들의 제목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며 앨범 이름과 재킷 디자인만 뇌에 새겨진다. 곡들은 그 앨범의 몇 번째 혹은 다음 곡의 그다음, 이런 공간의 형태로 쌓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부여받은 개개의 임무가 충실히 재현되고 누군가의 교감신경과 제대로 만나게 될 때, 자신만의 멋진 작품 1호가 탄생하는 것이다.


내게는 CD가 튈 정도로 들은 앨범이 한 장 있다.

카세트테이프 세대들에게는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이란 말이 있다. 비닐로 만들어진 물리적인 테이프가 끊임없이 돌아가니 못 견딜 만한 것이다. 하지만 CD가 튄다는 것이 그리 흔하겠나. 얼마나 들었던지 두 장이나 샀던 CD가 잔 스크레치로 인해 튀는 것이다. 결국 집에는 세 번째 산 CD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TheThe 더더밴드 4집은 내게 그런 앨범이다.

덩어리 째 두개골 안쪽 어딘가에 단단히 각인된, 하나의 작품으로 완결되어 개개의 제목이 흐릿하게 기억나지 않는 상태 말이다. 이 바다를 지나면 반사적으로 저 길이 다가오고, 저 길의 좌측에는 어떤 표지판이 나오는 것을 알고 있다. 길의 끝에 빨려 들어갈 듯한 어둠이 지나면 다시 푸른 바다가 나타날 도돌이표의 순환 또한.


파도 소리 너머 아련히 불어오는 기타 소리는 잠든 기억을 깨우네

폭발하듯 폭발하며 숨죽이며

차마 하지 못할 이야기는 공기 속에서 부유할 뿐이다

때로는 너 따위에게 나의 눈물은 사치일 뿐이라고 외치고 싶지만

그 후에 잠긴 회한이 나를 두렵게 할 지도

웃는 듯 우는 듯 내가 짓는 표정은 과연 어떤 형태일까

심장이란 단어를 쓰게 될지라도

너를 가슴속에 담고 싶었지

나는 이제 조그마한 몸부림 밖에 토해내지 못해

사라져 가는 것을 똑바로 응시할 때

이제 난 알아 끝을 향해 걸어갈 수 있음을

그리고 사라지네, 천천히 천천히

그 심연은 깊고도 깊어 다시 돌아갈 수 없음에


거의 6개월 동안 더더밴드 4집 만을 들었던 적이 있다.

몸과 같이 흐르는 그런 공기 같은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반사적으로 클릭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어두운 방안의 불을 밝히며 클릭. 샤워하며, 밥 먹으며, 책 읽으며 리피트 오올한 앨범은 허공 속에서 작은 음표로 떠 있는 형태. 이부자리에 눕기 전까지 계속 그냥 들었다. 어떤 실연이나 사연을 기대하겠지만 아쉽게 그런 것은 없다.

왜냐고 묻는다면 순수하게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반사적으로 계속 듣고 싶다는 마음이 끊임없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내 생애 그런 감정을 공유한 앨범은 다시는 없겠지. 그래도 알게 해 주어서 얼마나 소중할지.


밴드의 형태를 띠고 있고, 한희정의 감성이 큰 역할을 하였지만 더더밴드는 김영준의 음악적인 페르소나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오랫동안 그의 음악을 들어오며 약간은 고착된 컨셉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숨길이 가 닿은 작품들을 좋아한다. 공들인 마음이 전해지기 때문이고 그렇게 평생 자신의 음악을 할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꾸준히 그 길 안에 있는 마음을 지지한다. 이런 음악을 듣게 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란 인사를 하고 싶다.

각자에게는 한 시절의 풍경이란 게 있을 터인데,


내게 더더밴드 4집은 미열이 가득한 풍경이다.



더더밴드 4집 2003년 <I Won’t Stop>

https://youtu.be/_BhKpJ1nc1Q?si=ngT12vW9wi5iNzt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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