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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배 Oct 30. 2022

마감 날

회사가 전쟁터면 PTSD는 어쩌죠? 3화

수금일. 마감 D-1일.

오전 10시, 사무실은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영업사원의 책상은 사무직의 책상보다 좁다. 하루의 대부분을 외근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좁은 책상에 다닥다닥 모여 앉아 오전을 보내다가, 10시가 넘으면 바깥으로 탈출한다. 본사를 나서 바깥공기를 마시면 ‘살겠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는 반대였다. 출입구를 나서는 내 입에선 ‘죽겠다’는 푸념이 새어 나왔다.


오전 내내 제품 팀에게 욕을 먹었다. 옆자리에 있으면 의자라도 날릴 기세였다. 나는 빛이 바랜 유선 전화기를 들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들로서는 화날 만했다. 마감 업무로 바빠 죽겠는데 다짜고짜 전화해서 결제부터 해달라니. 신입의 훼방에 분통이 터졌을 것이다. 몇몇은 전화를 끊은 뒤 바로 승인해줬다. 몇몇은 아니었다. 외근을 나갈 때까지 끝내 해주지 않았다.


사람이란 존재는 간사하다. 처음에는 미안한 마음이었다. 내 잘못이란 감정도 있었다. 그런데 1명, 2명, 3명, 4명에게 욕을 먹다 보니 화가 났다. 이것들은 뭔데 나한테 화를 내는지 궁금해졌다. 4번째로 전화했던 제품 팀 사원은 유독 나를 쏘아댔다. 5분이 지나도록 자기 할 말만 내뱉었다. 내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순간, 침묵이 맴돌았다. 전화기 너머에서도, 주위에 있는 팀원들 사이에서도.


거래처로 가기 위해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뒤늦은 후회를 했다. 위기를 벗어나려면 행사 승인을 받아야 했다. 현재 회사 전산에 있는 C마트의 매출은 3천8백, 아직 2백을 더 줄여야 했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 제품 팀 사원 4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아까는 정신이 나가서.”

“왜요? 아까처럼 또 소리 질러보시지.”

“아닙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굴욕적인 전화를 끊고 결제 상황을 봤다. 곧바로 행사 승인이 났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 체력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정신도 없었다. 빨리 이 상황이 끝나기만을 바랬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수금은 큰 문제가 없었다. C마트를 제외한 4개의 거래처에서 정확한 금액이 입금되었다. C마트가 문제였다. 점장은 3천6백만 원을 입금했다. 분노가 치솟던 차에 휴대폰이 울렸다. 덧니 선배였다.


“야, 어디냐? 수금 다 확인했어?”

“네 다른 곳은 이상 없습니다. C마트만 3천6백 입금받았습니다.”


오후 5시, 덧니 선배와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30분 먼저 주차장에 도착했다. 지하 4층 주차장 구석에 차를 세우고 좋아하는 노래를 틀었다. 주차장은 유일한 안식처였다. 닭장 같은 사무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요함이 좋았다. 하지만 고요함은 곧 끝이 났다. 선배가 도착했고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회사 전산에서 C마트 매출 확인했어? 얼 마디?”

“3천8백입니다. 2백 남았습니다.”

“아직 행사 신청할 제품 좀 남았지? 박박 긁어서 신청해.”


사무실로 올라가니 똑같은 풍경이 보였다. 책상, 사무실, 앉아있는 팀원들. 모두가 어제와 똑같았다. 내 하루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은 저녁을 반복했다. 지하 식당에서 허기를 때우고 카페인이 가득 들어있는 우유를 샀다. 10시가 되자 사무실에는 4명밖에 없었다. 12시에는 나 혼자였고, 3시에는 청소 아주머니를 포함해 2명이었다. 구면이므로 가볍게 목 인사를 했다. 아주머니도 인사를 받아주었다. ‘저 인간은 뭐지’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새벽 5시가 되자 할 일이 없었다. 행사 신청할 제품이 바닥나버렸다. 신청서가 승인되면 얼마가 차이 날지 계산해봤다. 예상되는 매출 차이는 50만 원, 단 50만 원이었다. 긴장이 조금 풀렸다. 안 풀려도 어쩔 수 없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물끄러미 휴대폰을 봤다. 답장하지 않은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답장을 할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순간 졸음이 몰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9층 휴게실로 내려갔다. 안마의자에 파묻혀서 눈을 붙였다. 금방 잠이 들었다.


아침 7시, 화장실에 가 거울을 봤다. 3일째 밤을 새운 몰골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스프레이를 뿌려 고정시킨 머리는 기름기가 흘렀고, 턱에는 수염이 시커멓게 났다. 흡사 해골 같았다. 광대뼈가 들어가고 다크 써 글이 펜으로 그린 듯 자리 잡았다.


“얼굴이 왜 그래? 오늘도 밤샜어요?”


화장실에서 나올 때 근영 선배가 말을 걸었다. 나보다 1살 어리지만 5년 차인 대선배였다. 선배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보살’이었다. 누가 실수를 해도 화내는 법이 없고, 질문하면 하나하나 정성껏 알려주었다. 덧니 선배가 에이스라면, 근영 선배는 엄마 같은 존재였다.


“네, 회사에서 잤어요.”

“여기서? 여기 잘 데가 있나?”

“6층 사내 카페 소파도 있고, 9층 휴게실에 안마의자도 괜찮아요.”

“9층에 안마의자가 있어요? 회사 5년 다닌 나보다 더 잘 아네.”

“최근에 들여놨나 봐요. 모델이 새 거던데요.”

“얼씨구? 살만하네. 살만해. 그런 것도 보고. 얼른 들어가요.”


간만의 수다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보살 선배는 가방을 내려놓더니 자리를 비웠다. 10분쯤 지나자 커피와 우유, 샌드위치 2개를 들고 나타났다. 선배는 내 책상에는 우유와 샌드위치를, 자기 책상에는 커피와 샌드위치를 놓았다.

“밤샜으면 커피 엄청 먹었겠네. 그러다 죽어요. 우유 마셔요.”


선배의 관심에 내심 감동했다. 팀장님께 찍히고, 제품 팀에게 욕먹었지만 동료를 얻었다. 까칠한 덧니 선배도, 상냥한 보살 선배도 내 편이 되어 주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의지했다. 마감을 무사히 마친다면 두 사람에게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출근한 덧니 선배가 내 옆으로 왔다. 여전히 한 손에는 믹스커피를 들고 있었다. 선배는 의자를 바짝 당겨 앉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마지막 작전을 시작해보자. 너 거래처에서 거래처로 물건 옮길 때 어떻게 옮기는지 알지?”

“용달업체 전화해서 트럭 섭외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다음은?”

“제품이 이동했다고 결재 올립니다. 결제 승인되면 전산에 반영되고……아.”

“대충 뭔지 알겠냐?”

“C마트 매출 50만 원을 다른 거래처로 옮기라는 말씀이세요?”

“맞아. 실제 제품은 옮기지 말고 전산으로만 매출 이동시켜. 오늘 올린 행사 신청서 승인되면 C마트 매출 3천6백50만 원까지 깎이지? 거기서 50만 원을 다른 거래처로 옮기면? 3천6백 되잖아.”

“그러면 다른 거래처에 잔고 생기는 거 아닙니까?”

“내 거래처로 옮겨.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어떻게 처리한다는 거지? 덧니 선배도 가짜 행사 신청서를 쓴 건가? 아리송했지만 거부할 마음은 없었다. 어떻게든 마감 금액을 맞춰야 했다. 고비를 넘겨야 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선배는 팀장님께 다가가 무어라고 속삭였다. 팀장님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8시 30분, 팀 회의를 시작했다. 팀장님은 마감만을 강조했다. 외근 나갈 필요도 없으니 오늘만 무사히 넘기자고 했다. 나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제품 팀에 전화해 마지막 결제를 부탁하고, C마트 제품 이동 결제서도 작성했다. 오후 5시, 마감이 끝났다. 거래처 수 5개, 총 잔고 0원. 전산을 확인하고 의자에 거의 누워버렸다. 긴장이 쭉 풀리자 온 몸에 힘이 빠졌다. 팀원 전체가 조기퇴근 준비를 했다. 덧니 선배와 보살 선배가 다가오더니 내 의자를 툭 쳤다.


“신입, 자냐? 작전 성공 기념으로 내가 쏜다. 곱창에 소주 한잔하자.”

“집에 가서 자야 되는 거 아니에요? 많이 졸릴 것 같은데?”

생각보다 졸리지 않았다. 나는 짐을 챙기고 두 선배를 따라나섰다. 도착한 곳은 허름한 곱창전문점이었다. 6인용 테이블 6개가 있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덧니 선배는 회사 사람 만나기 싫으니 2층에서 후딱 먹고 가자고 했다. 2층은 좌식이었다. 신발을 벗고 자리에 앉았다.


“신입, 수고했다. 잔고로 액땜했으니 진정한 영업사원이 된 거야. 지점 영업사원 중에 잔고로 고생 안 해본 사람은 없어. 네가 좀 일찍 하긴 했지만.”

“그럼 두 분 다 잔고가 있으셨던 겁니까?”

“당연하지. 지금도 잔고 때문에 거래처랑 실랑이하는데. 잔고 안 생기는 거래처는 없다. 네가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다른 거지. 여하튼 앞으로 열심히 하자. 한번 해봤으니 잘할 수 있지?”


소주를 몇 잔 마시고 기억이 없었다. 보살 선배의 말에 따르면 1시간 정도 지나자 꾸벅꾸벅 졸았다고 한다. 나는 택시에 실려 집에 도착했고 일어나 보니 아침이었다. 주말이라서 천만다행이었다. 옷을 벗어 바닥에 던지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씻고 나니 다시 잠이 쏟아졌다. 그렇게 토요일을 침대에서 보냈다. 일요일도 하루 종일 잤다. 사람이 이틀 내내 잘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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