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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배 Oct 30. 2022

사고 친 것 같습니다.

회사가 전쟁터면 PTSD는 어쩌죠? 2화

사무실.

6시 50분,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부지런해서가 아니었다. 카페에서 밤을 새웠기 때문이다. 커피를 몇 잔 마셨더니 잠을 잘 수 없었다. 어쩌면 커피 때문이 아닐 수도 있지만. 휴게실 복도에 있는 커피머신으로 갔다. 차가운 커피를 뽑은 뒤 단숨에 들이켰다. 곧이어 어깨 끈이 있는 서류가방을 멘 남자가 들어왔다. 덧니 선배였다.


“신입, 벌써 출근했어? 그런데 너 믹스커피도 마시냐?”

“한번 마셔봤습니다. 달짝지근한 게 맛있네요.”

덧니 선배는 신기한 사람이었다. 175 정도의 키에 크지 않은 체형, 껄렁한 걸음걸이와 여유로운 말투가 특징이었다. 우리 팀에서 가장 한가해 보이는 사람을 꼽는다면 단연 1순위였다. 출근하자마자 믹스커피를 마시는 게 루틴이었다. 당과 카페인을 충전하는 자기만의 방법이라고 했다. 공짜니까 커피값도 적게 들고.


거래처를 받기 전에 동승한 적이 있다. 오전 10시에 거래처로 가서 10분쯤 상담하더니 밖으로 나와 카페로 갔다. 점심시간 전까지 휴대폰 게임을 하는 모습이 사뭇 신기했다. 오후가 되자 거래처를 2개 더 들렀는데 마찬가지로 10분 만에 나왔다.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낮잠을 자다 회사로 복귀했다. 당시에는 ‘이 사람 월급루팡이구나. 어울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마감이 가까울 무렵, 선배의 매출 랭킹은 1등이었다. 목표 달성률이 130%를 넘었다. 덧니 선배에겐 비밀이 있는 듯했다. 남들은 모르는 필살기가 있어 보였다. 도움을 청하기로 한 건 그 때문이다.

“선배님 혹시 10분만 얘기 가능하십니까?”

“아침부터 뭔 얘기? 너 혹시 사고 쳤냐?”

이 사람은 뭔데 이렇게 눈치가 빠르지? 저번에 마감 얘기한 것도 그렇고.

시간은 7시, 선배는 일단 커피를 뽑았다. 얼음을 때려 넣고, 커피를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자리로 가 가방을 놓고 왔다. 손가락으로 오른쪽을 가리켰다. 내부가 잘 안 보이는 회의실이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무슨 일이야? 마감이 잘 안돼?”

“이런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되니까 말해봐. 뜸 들이지 말고.”

“잔고가 생겼습니다. 회사 전산 하고 거래처 마감 금액이 차이 납니다.”

“차이? 얼마나 차이 나는데?”

“4백 정도 차이 납니다. C마트 점장님 칼질한 것 같습니다.”

선배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의자에 눕듯이 앉아 천장을 보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칼질은 확실해? 어떻게 확인했어?”

“경리과장한테 매입 리스트 받아왔습니다. 어젯밤에 다 확인해봤습니다.”

“용케 거기까진 했네. 일단 알겠다. 팀장님께는 내가 보고 드릴게.”


회의실을 나와 자리에 앉았다. 7시 30분이 가까워지자 사무실이 붐비기 시작했다. 곧이어 팀장님도 도착했다. 선배는 팀장님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몸을 바짝 숙이고 귓속말로 무언가 전달했다. 팀장님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곁눈질로 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덧니 선배가 돌아와 내 어깨를 쳤다. 돌아보니 팀장님도 함께 서있었다. 우리 셋은 방금 선배와 이야기했던 회의실로 다시 들어갔다. 선배가 앞장서고, 팀장님이 다음에, 내가 마지막으로 갔다. 대역죄인이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모양새였다. 기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팀장님은 불같이 화를 냈다. 무차별 폭격에 나는 물론, 덧니 선배도 타격을 입었다. 팀장님이 가장 싫어하는 행위는 ‘나서는 것’이었다. 자신이 나서야 하는 상황을 말한다. 좋아하는 행위는 ‘알아서 하는 것’. 고로 장점과 단점이 똑같았다. ‘자유롭다, 터치가 없다. 근데 너무 없다.’


잔고가 생기면 할 일이 많아진다. 일단 영업지원팀에서 호출이 온다. 얼마인지, 왜 생겼는지, 어떻게 해결할 건지를 일일이 보고해야 한다. 이쯤에서 끝나지 않는다. 매월 초, 마감이 끝나면 전체 메일이 온다. 메일에는 어느 팀의 누가, 얼마의 잔고가 생겼다고 대문짝만 하게 쓰여있다. 공개처형이나 마찬가지다. 팀장님은 얼굴을 들 수 없을 거다.


있는 듯 없는 듯 살아남은 양반에게 이런 이벤트는 쥐약이었다. 그것도 수금 하루 전, 마감 이틀 전이었으니 오죽하겠는가? 팀장님은 덧니 선배에게 특명을 내렸다. 책임지고 해결하라고.


신촌의 냉면집.

냉면집은 지하에 있었다. 넓은 공간에 사람이 제법 들어차 있었다. 덧니 선배는 물냉면을, 나는 비빔냉면을 주문했다. 선배는 만두를 하나 주문했다. 이 집은 냉면보다 만두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과연 그랬다. 모든 테이블에 만두가 놓여 있었다. 동그란 고기만두가 나오자 한 입 가득 물었다. 맛있었다. 생각해보니 어제 카페에서 먹은 케이크가 마지막 식사였다.


“점장 하고는 얘기해 봤냐?”

“아직 못했습니다. 오늘 가서 말해보려고 합니다.”

“쉽지 않을 걸. 쉽게 해 줄 일이었으면 장난도 안쳤겠지. 뭐 기선 제압일 수도 있고.”

“기선 제압을 그렇게 합니까?”

“종종 그런 사람들이 있어. 만만하다 싶으면 초장에 길들이려고.”


점장은 베테랑이었다. 현장에서 20년을 구른 베테랑 중의 베테랑. 상대한 영업사원만 한 트럭은 나올 터였다. 그런 인간에게 말랑말랑한 영업 1개월 차를 붙여 놨으니 얼마나 같잖게 보였겠는가. 처음 만난 날 점장은 나에게 ‘잘해보자’고 했다. 속뜻은 ‘내가 널 휘둘러서 잘 뽑아먹겠다’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마감부터 하자. 시간이 너무 없어. 오늘 가서 난리 쳐봐야 씨알도 안 먹혀.”

“그래도 됩니까?”

“그래야 되지. 그래도 되는 게 아니라. 팀장님 경기 일으킨다니까? 잔고 생기면 상무님한테 팀장님 끌려 가. 너도 부를 거고. 그것만은 피하는 게 좋아. 다 널 위해 하는 소리야.”

“이 상황에서 방법이 있습니까?”

“있긴 있어. 편법이라 그렇지. 일단 사무실 들어가면 납품한 물건 죄다 행사 신청해. 원래 월초에 신청해야 되는데, 신입이라서 몰랐다고 해. 제품 이미 다 나가서 행사 승인 안되면 너 죽는다고. 제품 팀한테 욕은 먹겠지만 한 번은 해줄 거야. 최대한 불쌍한 척해봐.”

“정상 가격에 나간 제품을 행사 가격에 나갔다고 하는 겁니까?”

“그래. 3천 원에 줬으면 2천 원에 줬다고 하라고. 회사가 허용하는 가격 범위 내에서. 제품 팀이 승인하면 회사 전산에 반영돼. 그런 식으로 매출을 깎아보자. 지금 회사 전산에 매출 4천 뜬다고 했지? 거래처는 3천6백이고. 4백을 깎아보자.”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품 팀이 알아채지 않을까요?”

“자세히 보면 알지. 근데 자세히 볼 수가 없지.”

일리가 있었다. 제품 팀은 제품의 가격정책을 담당하는 조직이다. 카테고리 하나당 담당 직원은 1명뿐이다. 마감이 가까워지면 하루에 수백 개의 결재서류가 올라오는데 처리하는 것도 1명이 다 한다. 꼼꼼히 보는 건 불가능하다. 그랬다간 24시간을 일해도 퇴근할 수 없을 테니. 덧니 선배는 그 점을 노렸다. 결재서류의 홍수 속에 은근슬쩍 가짜를 끼워 넣으라고 했다.


5시 30분, 사무실로 복귀했다. 다행히 다른 거래처는 이상이 없었다. 노트북을 켜고 행사 신청서를 쓰기 시작했다. 7가 넘자 팀장님이 일어났다. 8시가 지나자 팀원들이 모두 퇴근했다. 덧니 선배는 캔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며 건투를 빌어줬다. 시간은 9시, 고개를 쭉 뽑아 사무실을 둘러봤다. 아직 10~20명 정도가 일하고 있었다. 10시가 지나자 나 포함 3명. 12시가 되자 나 혼자 남아있었다. 3시가 넘자 청소 아주머니가 들어오셨고 나는 6층 휴게실로 대피했다. 바람을 쐬며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은 뒤 복귀하니 4시. 여전히 써야 할 행사 신청서가 산더미같이 남아있다. 해가 뜨고, 7시가 되자 사람들이 출근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믹스커피를 입에 문 덧니 선배가 어깨를 두드렸다.


“어떻게 돼가냐? 많이 썼어?”

나는 밤새도록 쓴 행사 승인서를 보여줬다. 덧니 선배는 내심 놀란 눈치다.

“고생했다. 너 기획서 좀 쓰는구나? 오케이, 오케이. 일단 오전 회의 끝나면 제품 팀 담당들한테 한 명씩 전화 걸어. 결제 좀 빨리 해달라고 해. 마감 때문에 급하다고. 왜 이제 올리냐고 하면 죄송하다고, 죽을죄를 지었다고 해. 신입이라는 말 빼놓지 말고.”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이틀 밤을 새우자 입에서 단내가 나올 지경이었다. 소주 1병을 마신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덧니 선배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뒤통수를 가볍게 ‘톡’ 치더니 물고 있던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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