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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배 Oct 21. 2022

4백만원의 행방

회사가 전쟁터면 PTSD는 어쩌죠? 1화

잔고.

영업사원들은 잔고라는 단어에 경기를 일으켰다. 잔고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는 ‘나머지 금액’이다. 자주 쓰는 말로는 통장잔고가 있다. 은행계좌에 남아있는 돈을 의미한다. 나도 입사하기 전까진, 지점에 오기 전까진 그런 의미로만 알았다. 지점에는 또 다른 잔고가 있었다. ‘나머지’라는 표현은 맞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대다수가 말하는 잔고는 ‘남아있는 나머지’ 금액이었다. 업계에서 말하는 잔고는 ‘못 받은 나머지’ 금액이었다.


잔고는 지점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광경이었다. 할인점이나 편의점을 담당하는 영업사원들에겐 낯선 단어였다. 당연하다. 업무가 다르기 때문이다. 지점의 영업사원들은 개별적으로 수금을 한다. 월말이 되면 1달 동안 납품한 물건값을 거래처마다 입금 받는다. 수금 날에는 사무실에 긴장이 감돈다. 돈이 잘 들어오면 한시름 놓는다. 돈이 잘못 들어오면 난리가 난다. 퇴근했다가도 다시 차를 몰고 거래처로 쏜다. 싸움을 하든 구걸을 하든 돈을 받고 나서야 집에 갈 수 있다.


신입사원이 지점을 기피하는 이유다. ‘돈 받는 스트레스’는 다들 알 것이다. 친구에게 빌려준 몇 만원을 받을 때도 감정이 상한다. 하물며 절대 갑인 거래처 사장에게 몇 천, 몇 억을 받아내는 일은 어떻겠는가?

물론 대다수의 거래처는 착실하게 입금한다. 항상 예외가 문제다. 착각해서 잘못 입금하거나, 하루 늦게 주는 거래처는 양반이다. 문제는 제대로 줄 생각이 없는 거래처였다. 잔고를 만드는 거래처들, ‘못 받는 돈’을 발생시켜 영업사원을 병들게 하는 것들 말이다.


첫 출근하던 날 옆자리에는 선배 1명이 있었다. 덩치가 크고 금테안경을 썼으며 포마드 머리를 한 남자였다. 나이는 나보다 1~2살쯤 어려 보였다. 월요일 오전, 모두가 바쁠 시간에 혼자 한가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퇴사 예정자였다. 내가 출근하고 1주일 뒤에 퇴사했다. 표면적인 사유는 ‘적성에 안 맞아서’. 하지만 다들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잔고 때문이었다. 못 받은 돈이 5천을 넘었다고 한다.


퇴사한 선배는 유망주였다. 싹싹한 성격에 근무태도도 좋아서 팀장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팀장님은 드디어 우리 팀에 에이스가 입사했다며 축배를 들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한번 신용을 얻자 계속 유지하고 싶어졌다. 매출을 내야 했다. 매출을 위해 각종 수단을 동원했다. 그 과정에서 무리하게 영업을 했고 잔고가 생겼다.


잔고가 생기는 이유는 2가지가 있었다. 거래처에서 장부를 조작하거나, 영업사원이 손해 볼 정도로 싸게 넘기거나. 선배는 둘 다였다. 매출 욕심에 회사에서 정한 가격보다 싸게 넘겼고, 거래처에서는 장부를 조작해 받은 물건도 안 받았다고 했다. 빚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감당할 수 없었던 선배는 팀장님에게 사실을 털어놨다. 팀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내가 들은 전말은 여기까지다.


수금 D-2일. 마감 D-3일.

오후 4시50분, 사무실은 고요했다. 대부분의 영업사원들이 복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전에 150명이 시끄럽게 떠들던 사무실에 사무직 여사원들의 타이핑 소리만 울렸다. 5시가 넘으면 하나 둘씩 나타날 것이다. 몇몇은 거래처에서 바로 퇴근할 테고.


내가 일찍 복귀한 이유는 간단했다. 신입이기에 거래처가 몇 개 없었다. 이틀이면 모든 거래처를 방문할 수 있었다. 일이 적으니 여유가 생겼다. 이번 달 마감을 미리 준비하기로 했다. 거래처를 받고 처음 하는 마감이니만큼 무사히 끝내고 싶었다.


노트북을 켜고 수첩을 폈다. 수첩에는 거래처에서 불러준 마감예상금액이 적혀 있었다. 거래처의 마감금액은, 매입금액을 말한다. 이번 달에 거래처에서 우리 물건을 사들인 총합이었다. 이를 회사의 전산과 비교한 후, 금액이 차이 나면 조정하는 것이 마감업무다. 보통은 거의 차이가 없다. 기껏해야 10~20만원 수준이다. 노트북이 켜지자 회사 전산에 접속했다. 거래처코드 6자리를 입력하니 전산에 입력된 우리 쪽 마감금액이 떴다.


“거래처에서 불러준 금액이 3천6백…… 회사전산에 있는 금액이 4천…… 4천?”


순간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누가 보진 않았을까?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사무실은 여전히 고요했다. 팀장님과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4백이나 차이 난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실수로 매입을 누락한 거 아냐?’

나는 노트북 화면을 끄고 곧장 일어났다. 전화기를 들고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구석에 자리 잡고 휴대폰의 숫자패드를 연타했다. C마트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경리과장님. 저 담당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담당님. 어쩐 일이세요?”

“다른 게 아니고, 뭐 하나 확인 부탁드리려구요. 제가 좀 전에 마감금액 받아갔잖아요? 그거 한 번만 더 불러주시겠어요? 제가 잘못 들은 거 같아서.”

“이번 달 말이죠? 가만 있자, 10월 마감금액…… 여깄다. 3천6백이네요.”

낭패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정확히 4백만원이 모자랐다. 창문에 비친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담당님? 듣고 있어요?”

“네 듣고 있습니다. 혹시 빠뜨린 게 없을까요? 매입을 누락했다거나.”

“에이 옛날이면 몰라도 요즘은 매입누락 없죠. 바코드 찍으면 자동으로 전산에 입력되는데요.”


사실이었다. 수기로 체크하고 수기로 입력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바코드를 찍으면 자동으로 매장 전산에 입력된다. 매입가격은 이전에 설정해놓은 가격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누가 바꾸지 않으면 바뀌지 않았다. 자동으로, 이전에 설정해놓은 가격, 누가 바꾸지 않으면, 어?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전화를 끊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시간은 5시10분, 경리과장은 6시쯤 퇴근한다. 거래처까지 빠르게 가면 30분 걸릴 테니 아직 시간이 있다. 노트북을 챙겨서 조용히 짐을 쌌다. 팀장님에게 거래처에 놓고 온 자료를 가지러 간다고 말했다. 팀장님은 사무실로 복귀하지 말고 곧바로 퇴근하라고 했다.


회전문 앞에서 덧니 선배를 만났다. 5년차 대리로 한가해 보이는 양반이었다.

“어이 신입. 벌써 퇴근하는 거야? 그래. 신입 때나 칼퇴하지, 언제 칼퇴하겠어?”

적당히 둘러대고 지나치려던 참이었다. 덧니 선배가 어깨에 손을 얹더니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신입, 마감 잘 하고 있지? 잔고는 없어야 된다.”


C마트.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퇴근한 건 아니었다. 매장으로 올라가 이곳 저곳을 들쑤시다 경리과장을 만났다. 과자 코너에서 박스를 까는 중이었다.


“담당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설마 마감금액 때문에?”

“비슷해요. 경리과장님한테 부탁 하나 하려고요.”

나란히 사무실로 내려갔다. 사무실에 들어서고 문을 닫았다. 경리과장에게 조용히 말을 꺼냈다.

“혹시 우리 제품 매입리스트 받을 수 있어요? 일자 별로.”

“일자 별로? 마감금액만 알면 되지 않아요? 그렇게 상세하게는 필요 없잖아요.”

“C마트하고 첫 마감이잖아요. 꼼꼼하게 하고 싶어서요. 그래야 경리과장님도 편하죠.”

“그건 그렇지만, 점장님이 알면 싫어하실 텐데.”

경리과장은 제법 호의적이었다. 회사를 좋아하거나 나에게 연정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말했다시피 마감은 거래처의 매입금액과 회사의 매출을 비교해서, 차이 나는 금액을 조정하는 행위다. 우리도 귀찮지만 거래처도 귀찮아 진다. 회사는 여기서 배려를 했다. 작은 금액 차이는 사유를 묻지 않았다. 결제를 올려서 자체적으로 처리했다. 경리과장은 회사정책의 수혜자였다.

매입리스트를 뽑는데 10분이 걸렸다. 두께만 봐도 엄청났다. 리스트에는 거래처가 매일 납품 받은 제품의 이름, 수량부터 가격까지 모두 적혀 있었다. 판매가와 행사사유도 꼼꼼히 기록되어 있었다.


집 앞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로 갔다. 영업시간은 24시간이었다. 커피 한잔과 케이크를 주문했다. 길고 긴 밤을 위한 각성제였다. 플라스틱 쟁반에 담아 2층으로 향했다. 구석진 소파에 앉아 귀마개를 끼니 잡음이 차단됐다. 당과 카페인을 우겨 넣으니 지친 몸이 순식간에 반응했다. 집중력이 빠르게 올라왔다. 리스트를 1장씩 넘겼다.


욕이 육성으로 나왔다. 망할 놈의 점장이 장부를 조작했다. 업계 용어로 칼질이었다. 장부를 난도질한다는 뜻이다. 내가 제시한 가격은 개당 800원이었다. 점장이 입력한 가격은 100원이었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800원에 준 물건을 700원으로 입력할 수는 있다. 실수 혹은 욕심에 의해. 그런데 100원은 선을 넘었다. 완벽한 고의였다. 비고란에는 ‘타임세일 특가’라고 적혀 있었다.


타임세일은 할 수 있다. 다른 거래처에서도 종종 타임세일을 한다. 손님을 모으는 훌륭한 전략이다. 그런데 보통은 거래처가 손해를 본다. 손해를 봐서라도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C마트는 달랐다. 1원도 손해를 보지 않았다. 납품업체와 상의도 없이 제멋대로 장부를 조작하고 그 손해를 영업사원에게 넘겼다.


점장의 만행은 끝이 아니었다. 마진을 30%씩 보는 제품이 많았다. 개인마트의 평균 마진율은 15~20% 사이인데 몇몇 제품의 마진율이 2배 수준이었다. 보다 보니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점장은 특정제품을 항상 세일가격으로 받았다. 행사기간이 끝나도 정상가격이 아니라 세일가격으로 받았다고 계산한 것이다. 사라진 4백만원의 행방이 여기에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내가 생각했던 회사생활은 이게 아니었다. 대기업에 입사해 승승장구하며 멋지게 살 계획이었다. 업무 1달 만에 이런 시련이 오다니. 퇴사한 선배 생각이 났다. 잔고가 5천이었던가? 처음에는 그 정도가 아니었겠지. 어느 순간 눈덩이처럼 불어났을 거다. 선배의 전처를 밟긴 싫었다. 취업 3수만에 들어온 회산데 버티고 버텨서 살아남을 작정이었다.


‘내일 덧니 선배에게 말하자. 빨리 말하면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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