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위의 중년 신사는 우리를 전사라고 했다. 신사의 정체는 영업본부장님이었다. 새하얀 백발에 잘 다려진 회색 양복, 금테 안경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임원과 똑같았다. 나는 막 신입사원 연수를 끝낸 참이었다. 대기업 뽕에 한껏 취해 있었다. 전사라고 듣자 전사처럼 박수를 쳤다. 본부장님처럼 되고 싶었다. 전쟁터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장수가 되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본부장님이 퇴장하자 인사팀 직원이 들어왔다. 전사는 아니었다. 하얀 얼굴에 깔끔한 복장을 한 남자였다. 남자는 오늘 일정이 끝났다고 알려 주었다. 다음 주부터는 배치받은 부서로 출근하라고 했다. 다만 집에 가기 전에 한 가지를 요구했다.
“각자 부서장님께 전화해서 미리 인사 한번 하세요. 전화번호는 직원 전용 어플에서 검색하시면 돼요. 아마 다들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전화 한 통 드리고 불금 즐기세요.”
핸드폰을 꺼내 어플에 접속했다. 배정받은 부서를 검색하니 낯선 얼굴들이 차례로 떴다. 직급 순으로 나열된 것 같았다. 꼭대기에 있는 얼굴을 클릭하니 전화번호가 나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신호음이 가는 동안 목을 가다듬었다. 아아, 안녕하십니까? 아아.
벨소리가 3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됐다. 나긋나긋한 서울 말씨의 중년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차분하지만 묘하게 신경질적인 말투였다. 심호흡을 하고 준비한 인사를 뱉었다.
“안녕하십니까. 다음 주부터 출근하게 될 신입사원 OOO입니다. 미리 인사드리고 싶어서 전화드렸습니다.”
“아~ 맞아. 다음 주에 신입사원 온다고 그랬지? 그래요. 주말 잘 쉬고 월요일에 봐요.”
“네 감사합니다. 주말 잘 보내십시오.”
“그래요. 각오 단단히 하고 와요.”
본부장님은 전사가 되라고 하고, 팀장님은 각오하라니. 내가 일할 곳은 전쟁터가 맞나 보다. 월요일을 생각하니 살짝 걱정이 됐다. 온갖 상상을 펼치려 할 때 동기 한 명이 어깨를 툭 쳤다.
“형,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금요일인데 맥주나 한잔 해요. 근처에 양꼬치 죽이는 데 있어요.”
동기의 이름은 민성이었다. 민성은 서울 영업본부에 배치받은 8명의 동기 중 1명이었다. 키가 크고 성격도 시원시원해 영업에 딱 맞아 보였다.
우리는 인재개발원을 나와 역 방향으로 갔다. 동기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가니 양꼬치집이 나왔다. 테이블이 4개쯤 있는 조그만 가게였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양꼬치 2인분에 칭다오를 주문했다. 첫 잔을 비운 뒤에 동기가 말을 꺼냈다.
“형은 지점이죠? 개인마트 담당. 진짜 힘들다던데.”
“그러게. 근데 왜 그렇게 힘든 거지? 할인점이랑 뭐 다를 게 있나?”
“개인이 하니까 그렇죠 뭐. 이마트, 롯데마트는 점장도 월급 받잖아요. 근데 여기 사장들은 월급쟁이가 아니니까요. 버는 족족 자기 돈이잖아. 물건값 조금만 깎아도 주머니가 두둑해지는데 영업사원 들들 안 볶는 게 이상한 거죠. 그래서 실랑이가 많데요. 100원이라도 더 깎고, 공짜 물건 하나라도 더 얻어내려고 하고. 말 안 들으면 물건 다 빼라고 하고.”
“물건을 다 빼라고 해?”
“자기 매장인데 뭔들 못하겠어요. 대기업 할인점이야 본사 지시대로 하는 건데, 개인마트는 그런 거 없잖아요. 행사, 가격, 진열 다 자기들 맘이지. 수 틀리면 물건 다 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던데. 프랜차이즈 통닭 집하고 동네 통닭집 차이 아니겠어요? 프랜차이즈는 본사에서 정해주면 그거 써야 되잖아, 좋든 싫든 간에. 동네 통닭집은 다르지. 납품업체 맘에 안 들면 안 받으면 그만이에요.”
“아아 이해되네.”
“여하튼 열심히 해야죠. 어떻게 들어온 회산데. 각오 단단히 합시다. 건배!”
짜샤이를 안주로 맥주 한 병을 비웠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꿔바로우를 추가했고 테이블 위에 맥주를 하나씩 늘려갔다. 한참을 얘기하던 중에 나와 동기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꺼내보니 영업지원팀에서 문자가 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