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배 Oct 30. 2022

담당, 내가 만만해 보여?

회사가 전쟁터면 PTSD는 어쩌죠? 4화

암울했던 11월이 지나고 12월이 왔다. 회사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1년 농사가 거의 끝났기에 압박이 덜했다. 유일한 화젯거리는 인사발령이었다. 지금 우리를 이끄는 상무님은 올해까지였다. 내년에는 다른 상무님이 올 터였다. 모두들 거래처보다는, 새로운 상무님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나뿐이었다. 상무님보다 거래처에 관심이 쏠려있는 인간은.


12월의 어느 날, 점장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자기를 우습게 아냐며 책상에 있는 물건들을 바닥으로 집어던졌다. 고함소리에 거래처 사무실 전체가 울렸다. 경리과장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얼른 빠져나갔다. 나는 병신이었다. 마감 하나 해놓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줄 알았다. 달라진 건 없었다. 전산에 있는 숫자만 바뀌었을 뿐.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는 그대로였다.


“이봐요 담당. 우리하고 거래하기 싫어?”

“거래하기 싫다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럼 뭐야, 왜 내 방식을 건드려?”

“방식을 건드는 게 아닙니다. 가격은 협의를 하셔야죠.”

“아니, 저번 담당이랑 다 협의했다니까? 뭘 더 협의해?”

“저랑은 협의 안 하셨잖아요?”

“담당 바뀔 때마다 전부 새로 협의해야 돼? 같은 회사, 같은 팀 아니야? 담당, 생각해봐. 담당은 본인 회사 제품만 관리하지? 나는 매장에 들어오는 제품을 전부 관리해야 돼. 그런 상황에서 영업사원 바뀔 때마다 협의를 뒤엎으면 일에 치여 죽으라는 얘기야?”

“힘드신 건 알아요. 아는데.”

“알면서 왜 그래? 나 죽어보라는 거야? 담당 회사는 연말이랑 관계가 없으니 한가하지? 우리는 달라. 연말, 연초, 명절까지 계속 바쁘다고. 이런 상황에서 계속 귀찮게 하는 거 민폐야. 아 몰라. 우리하고 거래하기 싫으면 거래하지 마. 나는 다른 회사 제품 받거나 업자한테 사 와서 팔 테니까. 들어가서 말해. C마트가 거래 그만하자 한다고.”

“이사님, 진정하세요. 무슨 거래를 그만해요.”

“그렇다는 얘기야. 담당, 2달만 있으면 명절이야. 명절 매출 중요하지? 나 괴롭혀서 담당한테 매출에 도움될 게 있어? 나는 명절 때마다 담당들 매출 확실하게 챙겨줬어. 근데 이번에는 힘들겠네.”


망할 점장 같으니. 반박하기가 힘들었다. 점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회사 입장에서도 명절은 대목이었다. 매출이 평소의 2배는 나오기 때문이다. 명절에 못 팔면 이후에 몇 달을 노력해도 실적 회복이 어려웠다. 잔고 때문에 요주의 인물이 된 지금, 명예회복이 절실했다. 명절에는 반드시 성과를 내야 했다. 하지만 C마트를 밀어줄 수는 없었다. 매출이 늘어날수록 빚이 늘어나니까. 점장은 칼질을 안 하는 조건으로 명절 행사 가격을 싸게 달라고 했다. 아주 싼 가격, 제품 팀이 알면 거품 물고 쓰러질 정도의 가격을 요구했다.


사실 한동안은 C마트에 가지 않았다.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해가 나는 제품은 슬그머니 납품을 중단하였다. 12월이 1주일쯤 지났을 때 팀장님이 불렀다. 손가락으로 모니터에 떠있는 지표를 가리켰다. 내 거래처들의 12월 실적이 실시간으로 나타났다.


“저기야, 매출이 너무 안 나온다. C마트 때문이지? 아직 화해 안 했어?”

“네. 아직은 사이가 좀 그렇습니다.”

“그러지 말고 점장이랑 잘 얘기해봐. C마트가 가장 큰 거래처인데 여기 매출 안 나오면 다른 거래처 매출 나와서 커버하기 힘들어.”

“네. 알고 있습니다.”

“곧 있으면 명절 행사 상담하지? 명절 매출 진짜 중요해. 이번 기회에 11월, 12월 매출 부진한 거 만회해보자. 할 수 있지? 힘들어도 참고해봐. 영업사원은 원래 고생하면서 성장하는 거야.”


팀장님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영업지원 팀에서 보낸 메일을 봤을 거다. 영업지원 팀은 매일 9시 전체 메일을 보낸다. 무려 150명이 읽는 메일이다. 메일에는 서울본부 영업사원들의 목표 달성 현황이 표시돼 있다. 맨 왼쪽부터 등수, 이름, 소속팀, 목표 현황, 목표 금액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중간순위는 ‘숨기기’ 설정되어 있었다. 보이는 것은 위에서 10명, 아래에서 10명이었다. 상위 10명 중에는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덧니 선배였다. 1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매출은 70%를 돌파했다. 하위 10명 중에도 아는 이름이 있다. 나였다. 전체 실적의 절반을 차지하는 C마트가 고꾸라지자 전체 실적이 바닥을 찍었다. 잔고에 이어 산 넘어 산이었다.


다시 거래처.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나자 점장은 심호흡을 했다. 화를 누그러뜨리는 중이었다. 책상에 있던 담배와 라이터를 챙기더니 밖으로 나섰다.

“담당, 혹시 담배 피우나?”

“안 피웁니다.”

“재미없네, 재미없어. 그래도 나가자. 나가서 얘기 좀 더 해.”


점장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자기 방식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 그럴 테지. 자신을 배달기사에서 점장으로 만들어준 방식일 테니까. 점장은 말했다. 영업사원이 손해를 보면서 물건을 싸게 주면, 자신은 매출로 보답한다고. 손해는 영업사원들이 처리해야 할 몫이라고 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점장은 실제로 매출을 잘 뽑아줬다. 얘기만 들었을 때는 타당해 보였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당장 나에게 거래처를 물려준 이대리님이 그랬다. 이대리님은 우리 팀의 팀원이었다. 경력은 과장급이지만 진급을 누락해 대리라고 했다. 진급 누락 이유는 잔고였다. C마트에 2천의 잔고가 있던 사실이 발각되었고 작년 진급에서 누락되었다. 그리고 올해 10월, 인사발령이 났다. 발령 장소는 전남지사, 출근 일자는 1주일 후였다.


대리님은 기혼자였다. 아이가 셋 있었고 서울을 떠나본 적 없는 서울 토박이였다. 이대리님은 인사발령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오전 내내 흡연공간에서 담배만 태워댔다. 주말이 지나자 사직서가 제출됐다. 이대리님의 거래처는 팀원들에게 나누어졌다. 나는 그때 C마트를 맡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담당, 그럼 이건 어때?”

“뭐 말입니까?”

“오케이. 내가 더 이상 장부 가지고는 장난 안칠게. 가격도 담당하고 새로 협의하고. 대신에 싸게 줘. 전단 행사 들어갈 물건은 특히 싸게. 여러 물건 말고 5개 정도만 확 싸게 달라는 얘기야.”

“어차피 잔고 생기는 건 똑같지 않나요?”

“다르지, 이 양반아. 지금은 협의 하에 하는 거잖아. 어디서 얼마나 손해가 나오는지 미리 알 수 있으면 정리하기도 쉽지 않아? 담당, 요번에도 정리했다며? 미리 알고 월 초부터 정리하면 할 만하지 않겠어?”


솔깃한 말이었다. 점장의 제안은 일리가 있었다. 이번에 고생한 이유는 2가지였다. 첫째는 손해가 어디서 난 건지 몰랐다는 점, 둘째는 마감 며칠 전에 알았다는 점이었다. 손해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고, 월 초부터 정리할 수 있다면 밤을 새울 이유는 없었다.


덧니 선배, 보살 선배와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도 생각이 났다. 잔고가 없는 거래처는 없고, 지금도 거래처와 실랑이가 있다고 했다. 그 말은 본인들도 잔고가 있으며 계속 씨름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머릿속에 전구가 켜지는 느낌이었다. 매출 부진을 벗어날 방도가 보였다.

“이사님, 말씀하신 대로 하시죠.”

“정말이야? 담당, 생각 잘했어. 물건 싸게 주면 서로가 좋지.”

“대신 매출은 확실하게 뽑아주셔야 합니다.”

“알았어, 알았어. 기대해. 내가 팍팍 밀어줄게.”


C마트와 나는 협정을 맺었다. 나는 C마트를 밀어준다. C마트는 매출을 뽑아준다. 간단한 협정이었다. 다만, 부산물이 생겼다. 잔고였다. 나는 C마트와 행사상담을 할 때마다 행사 신청서를 거짓으로 썼다. 신청서에는 각기 다른 제품 3개를 500원씩 세일한다고 썼다. 실제로는 1개 제품만 1,500원을 깎아줬다. 신청서를 쓸수록 실력이 늘었다. 그럴듯한 데이터와 논리를 들어 실제 하는 행사인양 꾸며대곤 했다. 제품 팀은 의심하지 않고 승인해 줬다.


작업은 주로 집에서 했다. 괜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였다. 미리 IT팀에 연락해 VPN신청을 했다. 덕분에 집에서도 회사 전산에 접속할 수 있었다. 퇴근을 하고 행사 신청서를 썼다. 밤늦게까지 쓸 때도 있었지만 매출의 기쁨에 기꺼이 감수했다. 몸은 많이 피곤했다. 가끔 자려고 누웠을 때 심장이 빨리 뛰긴 했지만 조금 지나면 괜찮아졌다.


12월 말, 어김없이 전체 메일이 왔다. 메일에는 12월 목표 달성 현황이 적혀 있었다. 상위 10명에는 덧니 선배가 있었다. 목표대비 130% 달성이었다. 나는 20위 권에 들었다. 목표 대비 93% 달성이었다. 그날 이후 팀장님에게 불려 가지 않았다. 팀원들도 나를 인정해 줬다. 드디어 나의 전성기가 왔구나, 그게 내 생각이었다.

이전 04화 마감 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